천안.아산

천안 왕자산(252.4m)- 영인지맥분기점 -망향의동산.

산경표 2024. 6. 13. 11:55

천안  왕자산(252.4m)- 영인지맥분기점  -망향의동산.

                                

◈ 일시 : 2024.  06. 07(금).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11km.  6시간 40분.




◈ 지도.

 

 

◈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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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정리.

 

06.04(화). 11차 항암주사를 맞고 06.05일엔 보훈부에서 보훈의달이라고 아내도 함께

무료 건강검진을 해준다고해서 바람도 쐴겸해서 대전의 검진센타를 가는길에
대전 뿌리공원,동춘당. 우암공원을 다녀왔다.

오늘도  사진이라도 남겨볼려고 옛추억들을 되새기며 한바퀴 돌아보고

망향의동산옆에 사는 고향지인을 만나서 식사라도 할려고 길을 나섰는데

산행끝나고 지인집 근처에서 전화를 해보니 애석하게도 전화번호는 이미
타인에게로 넘아간것을 보니 지인은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닌듯싶어 마음이 아팠다.

 

 

 

09 : 32. 천안 터미널근처 나은필병원정류소교보에서 출발.

09 ; 43. 경부고속도로 지하통로 지나 산길초입.

09 ; 51. 향교고개. 삼남길이 고개를 넘어가는곳이다. 직진 아래에 천안향교. 좌측 팔각정쪽으로 간다

10 ; 28/11 : 08. 왕자산 간식.

11 : 25.구름다리.근래에 다리 건너편에 안서동과 유량동을 잇는 터널이 뚫렸다.
              여기서부터 금북정맥마루금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

11 : 45. 성불사입구.좌

12 ; 20. 대머리봉.

12 : 26. 금북정맥. 쉼터.

12 ; 53. 유왕골고개. 좌측 아래에 각원사. 우측 아래엔 약수터.

12 ; 58/13 : 32. 상명대삼거리.점심.

13 : 42. 372m봉.유왕사 뒷봉  출발점에서 6km.

13 ; 48. 숙의하씨묘. 성종의 후궁다.

14 : 02. 계성군묘. 성종의 아들묘.

14 : 12. 영인지맥 분기점.

14 : 16/35. 성거산을 건너다보는 전망대. 벤치에서 쉬고.

14 : 38. 다시 영인지맥 분기점.우측능선으로 내려간다.

14 : 45. 전망바위. 국민은행연수원과 문암저수지와 천안시내 조망처.

14 : 54. 우측으로 천흥저수지 갈림길.

14 : 57. 좌측으로 국민은행연수원. 문암저수지 갈림길.

15 : 11. 293.6m 전망대. 성거산과 금북정맥,  내가있던 유왕사터와 문암저수지를 바라본다.

15 : 16. 290m봉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15 ; 23. 망향봉. 영인지맥은 좌측으로 . 오늘은 직진해 망향의동산으로 하산.

15 ; 42. 산길이 끝나고 망향의동산경내로 들어선다.

15 : 46. 망향동산 위령탑앞 귀정각.

16 : 02. 대한항공위령탑. 우측의 정문으로 나간다. 

16 : 12. 망향정류소.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고인이 되신듯.

 

 

09 : 32. 천안 터미널근처 나은필병원정류소교보에서 출발.

09 ; 43. 경부고속도로 지하통로 지나 산길초입.

한달전에는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었더니 오늘은 밤꽃이 활짝 피었다.

 

밤꽃.

 

 

 

09 ; 51. 향교고개. 삼남길이 고개를 넘어가는곳이다. 직진 아래에 천안향교. 좌측 팔각정쪽으로 간다

깔딱고개.

 

좌측 팔각정은 오늘은 패스.

 

 

 

계단을 올라가고

 

해맞이장소. 신년 1.1일에 신년 일출행사를 하는곳이다.

해맞이장소에서 본 태조산(좌)과 독리기념관 뒷산인 흑성산(우).

 

 

10 ; 28/11 : 08. 왕자산 간식.

왕자산. 좌측은 호서대 가는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의 유량동과 안서동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252m). 산 남쪽에 천안향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각 급 학교와 공설운동장,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등이 있다. 산 모양이 '왕(王)'자처럼 생겨서 왕자봉 또는 왕자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팔도군현지도』(천안)에 상리면 동쪽에 위치하며 성거산 남쪽으로 연결된 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술사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이 산에 올라와서 지세를 살핀 후에 성을 쌓고 천안도독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일명 왕자산성이라고도 한다.

 

이때 태조는 탕정(井)[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대목악(大木岳)[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사산(蛇山)[지금의 천안시 직산] 등 주변 지역의 땅을 각각 분할하여 천안이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

 

마한 목지국의 중심이었다고 추정되는 천안은 백제에 병합된 후 직산, 목천 등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천안의 북쪽에 위치한 직산은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치소,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지역이었는데, 고려 초에 직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쪽 편에 위치한 목천은 백제 때 대목악이었다가 757년에 대록군이 되었으며, 고려 성종 때 목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조선에 들어서 1413년에 목천현이라 하게 된다.

백제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직산·목천과는 달리 ‘천안군’의 출발은 고려 건국 이후였다. 태조 왕건이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동서 두솔을 합해 930년에 후백제 공략을 위한 군사적 거점 도시로서 천안부(天安府) 도독(都督)을 둔 것이 그 출발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천안 지역은 천안부와 그 영현인 풍세현과 직산현, 그리고 청주의 목주(木州)가 있었다.

 

천안도독부는 후백제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군사적 거점이었다. 그러나 천안도독부 설치의 명분으로 풍수지리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을 가졌다는 오룡쟁주지세라는 풍수지리적 배경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구름다리.1997.12.30준공. 길이 62m폭 1.5m.높이 18m.

구름다리에서 우측 유량동과 뒤로 태조봉에서 취암산으로 가는 금북정맥.

 

구름다리에서 좌측 안서동.

 

 

 

11 : 45. 성불사입구.

대머리바위 620m. 구름다리 690m.침목계단을 힘들게 올라가 봉 두개를 넘어간다.

 

 

12 ; 20. 대머리봉. 표고 340m

대머리봉(약 340m).

 

대머리봉(약 340m)에서 뒤 돌아 본 왕자봉과 천안시내.

 

대머리봉(약 340m)에서 본 흑성산(중)과 태조봉(좌). 

대머리봉(약 340m)에서 본 상명대와 (앞)뒤로 단국대병원뒤로 영인지맥.

 

 

12 : 26. 금북정맥. 쉼터.

금북정맥. 쉼터.

 

12 ; 53. 유왕골고개. 좌측 아래에 각원사. 우측 아래엔 약수터.

 

寺(각원사)

재일교포 각연거사(覺然居士) 김영조(金永祚)의 시주로 1977년 5월에 세워졌으며, 천안의 진산이라는 태조산에 자리잡고 있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찰을 세우려 한 것이 발원의 본뜻이다.

현재 이곳에는 대웅전(大雄殿), 설법전, 관음전(觀音殿)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높이 12m, 둘레 30m, 무게 60t에 이르는 거대한 청동아미타불상과, 엄청난 규모의 태양의 성종이 특히 유명하다. 또한 1996년 10월 15일에 낙성된 대웅전은 목조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이 절의 언덕에는 203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백팔번뇌와 관세음보살의 32화신, 아미타불의 48소원 및 12인연과 3보(寶) 등 불법과 관계있는 숫자를 합해서 정한 것이라 한다.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의 사찰이며, 현재 각원사 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12 ; 58/13 : 32. 상명대삼거리.점심.우측으로

 

 

잣숲벤치.

 

11 : 42. 372m봉(유왕사 뒷봉). 출발점에서 6km.해병대 372기 푯찰.우측으로 내려가며 잠시후에 숙의하씨묘.

 

우측길이 숙의하씨묘 가는길.

우측아래에 있던 식당은 지금도 하는지?

 

숙의하씨묘 우측에서 내려다본 유왕골과 흑성산.

 

13 ; 48. 숙의하씨묘. 조선 9대왕 성종의 후궁이다.

숙의하씨묘. 시흥에 있던것을 도시개발때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숙의하씨묘.

 

숙의하씨묘위에서 본 성거산 정상부.

 

성종

 ]

요약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출생-사망재위기간가족관계

1457 ~ 1494
1469년 ~ 1494년
왕비 공혜왕후(), 정현왕후(), 아버지 덕종(), 어머니 소혜왕후()

휘()는 혈(),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 이장()과 한확()의 딸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 1468년에 잘산군()으로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사예()와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매사냥도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457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 이황()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8대 예종(, 재위 1468~1469)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신숙주(), 한명회() 등 훈구대신의 뜻에 따라 형인 월산대군() 이정()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이현() 등을 제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성종은 1467년(세조 13)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1474년(성종 5)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476년(성종 7)에 봉상시() 판사 등을 역임한 윤기견()의 딸 제헌왕후() 윤씨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에 세자 융(

, 뒷날의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하고 윤호()의 딸 정현왕후() 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를 사사()하였는데, 이 일은 뒷날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 1504)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이외에도 명빈 김씨( ), 숙의 김씨( ) 등 수많은 후궁()을 두었으며, 그들과 20여 명의 자녀를 낳았다.

성종은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집권초기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김질() 등 9명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으로서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한 후 김종직(), 김굉필()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1478년 홍문관()을 예문관()에서 다시 분리하여 왕권을 호위하는 정치기구로 만들고, 새로운 인물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등 왕권 강화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성종은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세종과 세조 연간에 기틀이 형성된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474년(성종 5)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 《경국대전()》을 더욱 보충하여 《대전속록()》을 간행하였다. 1491년 문신 중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직무를 쉬면서 학문에만 전념케 하여 '사가독서()'라고 불리는 호당() 제도를 실시하였고, 서적의 간행도 활발히 추진하여 《여지승람(輿)》,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 등을 통해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소탕했으며, 1491년(성종 22) 허종()을 통해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진압하였다.

성종은 재위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殿)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에 매장되었다.

 

 

등산로로 나왔다. 입구에 수도원가는 이정표가 있다.

 

13 : 54. 도상 갈마고개. 계성군묘. 숙의하씨묘 이정표. 좌측으로내려가면 국민은행 연수원인데 길이 시원찮다.

 

 

 

14 : 02. 계성군의묘. 조선 9대와 성종의 아들묘. 숙의 하씨의 아들.

계성군의묘. 성종과 숙의하씨의 아들. 시흥에 있던것을 도시개발로 이곳으로 이장했단다.

 

 

 

14 : 12. 영인지맥분기점. 준희님의 영인지맥분기점 표찰.좌측은 영인지맥.

 

 

14 : 16/35. 성거산을 건너다보는 전망대. 벤치에서 쉬고.되돌아 내려간다.

성거산 정상부.가운데봉에 삼각점.

 

 

14 : 38. 다시 돌아온 영인지맥 분기점.우측능선으로 내려간다.

 

 

 

14 : 45. 전망바위. 국민은행연수원과 문암저수지와 천안시내 조망처.

우측능선이 영인지맥. 가운데봉이 전망좋은 293.6m봉.

국민은행연수원과 문암저수지.

 

 

 

14 : 54. 우측으로 천흥저수지 갈림길.

 

 

 

14 : 57. 좌측으로 국민은행연수원. 문암저수지 갈림길.

좌측길이 연수원가는길.

 

15 : 11. 293.6m 전망대. 성거산과 금북정맥,  내가있던 유왕사터와 문암저수지를 바라본다.

지나온 금북정맥. 좌측봉이 372m봉. 우측 골짜기 건물은 예비군 훈련장.

훈련장 좌측 골짜기 하단의  내가 있던 유왕사터.

뒤돌아 본 성거산정상부와 영인지맥 분기점(가운데 뽕꾹헌 두봉중 우측봉).. 우측 아래는 국민은행 연수원.

성거산과 영인지맥 분기봉을 당겨보고.

 

유왕사터와 금북정맥을 다시보고. 

문암저수지와 백석대.

 

천호저수지와 천안시내를 당겨보고

293.6m.

 

15 : 16. 290m봉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15 ; 23. 망향봉. 영인지맥은 좌측으로 . 오늘은 직진해 망향의동산으로 하산.

 

 

하산길. 

 

15 ; 42. 산길이 끝나고 망향의동산경내로 들어선다.

장미터널을 나가면 망향의동산 경내로 들어간다.

망향의동산 

 

 

15 : 46. 망향동산 위령탑앞 귀정각.

귀정각앞에서 본 위령탑.

망향의 동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후 망국의 서러움과 갖은 고난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숨진 재일동포들의 안식을 위해 1976년 10월 2일에 조성되었다. 이후 해외동포 가운데 조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만 적당한 묘역을 구하기 어렵거나 절차상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해외동포를 향한 우리 국민의 동포애가 살아 숨쉬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말라위,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각국에 거주하던 해외동포들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강제로 연행되어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들은 그들이 일본에 거주하던 주요 지방별로 합장묘역에 안장되었다. 망향의 동산은 합장 묘역과 봉안당(망향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만 70세 이상인 사람은 묘지 예약이 가능하다.

묘역은 3개로 구성되는데, 위령탑 광장 전면의 무궁화묘역, 위령탑 정면 우측의 장미묘역, 위령탑 광장 좌측의 모란묘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망향의 동산에는 유족대기실을 비롯하여 유족들이 원하는 의식에 따라 각 종교의식으로 제례를 거행할 수 있는 귀정각, 1976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건립하여 기증한 위령탑 등이 있다.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된 KAL기 희생자 269명의 묘역과 추모탑도 이곳에 있다. 망향의 동산이 조성된 매년 10월 2일을 ‘망향의 날’로 정하여 합동위령제를 지낸다. 망향의 동산 건너편으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 망향휴게소가 설치되어 있다.

2013년 망향의 동산에서 국립 망향의 동산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관리자명도 국립 망향의 동산 관리원으로 바뀌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립 망향의 동산 [國立望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귀정각은 유족들이 기독교.불교.유교들이 제례를 거행하는곳.

카페.

규정각과 위령탑.

 

 

 

 

16 : 02. KAL기 희생자 위령탑 . 우측의 정문으로 나간다. 

KAL기 희생자 위령탑

KAL기 희생자 위령탑에서 뒤돌아 본 망향의동산.

 

 

KAL기 희생자 위령탑.

KAL기 희생자 위령탑 좌측의 조형물.

 

 

1983년 9월 1일, 뉴욕발 앵커리지 경유, 서울행의 대한항공기(KAL : Korean Air-line) 007편 보잉 747 점보여객기가 사할린 부근상공에서 소련전투기의 미사일공격을 받고, 사할린 서남쪽 모네론섬(海馬島) 해상에 추락하여, 승객 240명과 승무원 29명 등 2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겨우 유품이 반환되었을 뿐 유체에 관한 정보와 블랙박스 회수의 유무를 포함하여 상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은 사건확인 후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의 비인도적 잔학행위에 강력히 항의하고, 소련의 사과와 피해보상, 사건책임자처벌, 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방지에 대한 보장 등 4개항을 요구,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하였다. 서방 측 여러 나라는 소련여객기의 운항을 전면규제하고, 미국은 소련과의 문화교류를 단절하였다. 일본도 소련과의 외상회담(外相會談)ㆍ무역회담의 중지를 고려하는 등 일ㆍ소관계도 악화되었다. 민간차원에서도 국제조종사협회 연맹(IFALPA)이 KAL기 격추에 대한 보복조치로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하기로 결의하였다. 사건 후의 1984 년 5월 국제민간항공기구의 총회는 국제민간항공 협약을 개정하고 민간항공기에 대한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국제민간항공협약 3의 2)을 새롭게 채택하였다(미발효).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항공기피격사건 [Shooting of the Korean Airline Incident]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KAL기 희생자 위령탑 우측의 조형물.

KAL기 희생자 위령탑 좌측의 조형물.

 

KAL기 희생자 위령탑에서 뒤 돌아 본 망향의동산 

KAL기  희생자 위령탑에서 뒤 돌아 본 망향의동산 좌측봉이 하산한 망향봉.

 

천안-성거-입장-안성가는 지방도로.

정문에서 본 망향의동산입구.

 

 

16 : 12. 망향정류소.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고인이 되신듯.

버스정류소에서 본  KAL기   희생자 위령탑.

망향의동산가는 버스 노선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