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산행

내고향 안성 서운산(548m).

 

내고향 안성 서운산(548m).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 GPS 거리 10.56km .  5시간 30분(시간과 거리는 벌 의미없음) .


가는길에 바우덕이묘와 청룡저수지를 둘러 보고
주차장-청룡사입구-서광사-토굴암(서운암)-좌성사-탕흉대-서운산정상-은적암-청룡사-부도-바우덕이사당-주차장

 

◈ 일시 : 2016. 1. 17(일).  

 

◈ 날씨 :  미세먼지로 잔뜩 흐려 시계는 별로임.

 

◈ 동행인 : 혼자서

 

◈ 경비 :

 

◈ 지도.

 

 

서운산 지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왼쪽에 원을 그린곳이 내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살았던 고향으로
지금은 둘째 형님과 사촌.팔촌등이 많이 살고있다.
이번에 지도를 자세히 보니 마을 이름이 용등봉(龍登峰)인데 용둥봉으로 표기돼있어
국토지리정보원에 수정해 달라고 민원을 넣었다.

 

 

◈ 트랙.

 

 

서운산1601.gpx

 

 

◈ 일정정리.

 

10 ; 8/10. 바우덕이묘.
10 : 19. 청룡저수지.
10 ; 27. 주차장출발.
10 ; 34. 청룡사앞. 청룡사경내는 내려올때 들리기로 하고  좌측 서광사 표지판판뒤로 오름.
10 : 55. 능선위.좌측으로 청룡저수지,바우덕이묘 하산길.
11 ; 10/12. 서광사.금북정맥과 양대저수지조망.
11 : 20. 423.1m.
11 : 27. 안부.좌성사는 직진능선. 우측 내원암터 찾으로 내려감(길없음)
11 : 38. 폐 움막터. 내원암터인줄 알았더니 아니다.
11 : 51/12 : 46 . 토굴암(서운암). 내가 입시공부를 했고 수양모를 만난  암자로 가끔 오는 암자다.종문스님과 차 마시고
12 ; 57. 스님 안내로 내원암터.하 토굴암터를 둘러보고(내가 있을땐 건물이 하나 있었다). 주춧돌만있고 은행나무밭.
13 : 08. 다시 토굴암(서운암).
13 : 20.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 시원한조망.법당뒤에 약수.

13 : 25. 서운 북산리 석조여래입상. 정자. 서운산성.
13 : 28. 엿날엔 용굴이라  불리던 바위굴.
13 ; 34. 탕흉대.GPS 525m.조망.
13 ; 43. 544.5m 서운산 서봉에서 점심.
14 : 00/13.  541.7m 밑 막걸리집(?)에서 잠시쉬어가고
14 ; 16. 우측으로 청룡사 하산 임도길.
14 : 21. 삼거리. 우측으로 은적암, 청룡사 하산길.
14 : 21. 정자.서봉과 동봉이 보임.
14 ; 29. 헬기장위 금북정맥 마루금.
14 : 34. 서운산정상. 삼각점(진천21)과 산불감시탑.
14 ; 39. 서운산 정상석과 조망데크. 안성시와 이티재쪽조망.
14 : 47. 다시 내려온 삼거리.직 은적암.청룡사. 우측은 좌성사,탕융대.
14 ; 51. 삼거리. 직진은 청룡사, 좌측은 은적암경유 청룡사.
14 ; 58. 은적암.
15 : 21. 좌성사에서 내려온 임도 삼거리.
15 : 33. 청룡사.
15 ; 44. 청룡사 부도군
15 ; 52. 바우덕이사당
15 : 59. 주차장 원점회귀.

 

 

◈ 산행후기.

 

 

34번국도에서  바우덕이묘 들어가는 입구인데
표지판은 저앞 모랭이를 돌아가라 돼 있어 그쪽으로 가보니 U턴하여 들어가야하니
여기서 들어가는게 낫다.

 

 

 

U턴하여 들어온길과 만나는곳.

 

 

 

 

10 ; 8/10. 축대위가 바우덕이 묘. <2012년 처음 목 디스크 치료할때 찍은것).
묘뒤능선으로 서운산 둘레길이 있다.

 

 


 

 

바우덕이 묘 안나판.

 

 

 

바우덕이(金巖德)은 누구인가?

 

1848년(헌종 14)∼1870년(고종 7). 조선후기의 예능인.

바우덕이는 열 다섯 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써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천재 예인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5세때인 1853년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남사당패에 맡겨져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 놀이를 익히게 된다. 바우덕이가 15세 되던해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1865년 고종 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불러서 공연을 펼쳤는데 그 때 뛰어난 공연으로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 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돌면서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어 18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 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 안성 청룡 바우덕이 /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라는 가사의 민요도 전하는데, 바우덕이의 뛰어난 기·예능과 대중적 인기를 말하는 내용이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무덤이 있다.

 

 

 

남사당[ ]

 

남사당패라고도 하며, 일종의 유랑예인 집단이다. 유랑예인 집단은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남사당이다. 남사당의 연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빈약하여 《고려사》《해동역사》《문헌통고》 등에 기록된 단편적인 것 밖에 없다. 위의 기록도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남사당을, 풍속을 해치는 패륜집단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적인 민중놀이 집단으로 출발하여 지배층이 주관한 놀이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으며, 유지도 그 만큼 어려웠다.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한편, 매춘을 부업으로 삼는 집단에서 출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출현함으로써 이를 남사당이라 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으로 광대·장인·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지만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자기들만의 남색사회()를 이루고 유랑생활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과 관련을 맺고 절을 집결지로 삼기도 하였다. 알려진 남사당패의 은거지는 경기도 안성·진위, 경상남도 진양·남해, 전라남도 구례·강진, 황해도 은율·송화 등 지이다.

조직은 모갑이 또는 꼭두쇠라고 부르는 대장 밑에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기획:1~2명)가 있고, 각 연희분야의 선임자인 뜬쇠(조장:약 14명), 수련생인 가열, 초입자인 삐리, 고문격인 저승패, 잔심부름을 맡는 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지며, 대내외적으로 책임지는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단원들이 모여들거나 흩어진다. 곰뱅이쇠는 남사당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인데,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얻는 일을 맡았다. 뜬쇠는 자신들이 하는 연기의 규모에 따라 몇 명씩의 가열을 둔다.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연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면 가열이 되며, 여장()하는 것이 상례이다.

남사당패거리 사이에서 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외모가 뛰어난 삐리가 많은 패거리일수록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원들은 보통 가난한 집의 어린이를 받아들이거나 가출아로 충원하였으며, 때로는 유괴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가난한 농가 출신이나 고아 등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으나 규율은 엄격하여 일사불란하였으며, 흥행을 통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도 하였다. 놀이가 없는 겨울에는 삐리들에게 연기를 지도하였다.

연기 종목은 획일적인 것으로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 6가지가 있다. 풍물은 첫째 순서로, 꽹과리·징·장구·날라리(태평소)를 불고 치며 노는 농악이다. 버나는 대접이나 접시를 돌리는 묘기이며, 묘기로 끝나지 않고 버나잡이와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대사와 소리가 재미를 더한다. 살판은 땅재주 묘기로,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불렀다.

어름은 줄타기로, 버나와 마찬가지로 어릿광대의 대사와 소리가 그만이다. 덧뵈기는 탈놀음이며, 4마당(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으로 구성된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좋은 풍자극이다. 덜미는 맨 마지막 순서로 꼭두각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인형극이며,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지방에 따라서 '박첨지() 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도 한다.

<두산백과에서>

 

 

 

 

 

바우덕이묘.


 

 

 

 

바우덕이묘에서 내려다 본 풍경 .
좌측 빨간집, 우측 공장앞쪽에 34번국도가 있다.

 

 

10 : 19. 청룡저수지.
맨뒤능선이 금북정맥.

 

 

 

10 : 19. 청룡저수지.
내가 입시공부할땐 우마차에 쌀을실어 이길로 올려왔고
 대학 다닐때 저수지 공사를 했는데 그때 공사 십장을 우리동네 이장님이 봤고
공사가 끝나고는 저수지 관리를 맏아보다 작고했고 그 부인은 나를 업어 키워준 유모였다.  

 

 


 

10 ; 27. 주차장.
ㅣ일 2000원인데 주말이라 돈안내는 길가는 꽉차있고 주차장도 만차다.

바로앞이 버스정류장으로  아침 안성 신터미널에서 들어오는 차는 06 ; 25. 07 ; 35.  08 : 55.11 : 05...17 ; 15. 18 ; 35. 20 :35.

청용에서 안성 나가는 차는 07시. 08 : 10. ..16 : 30. 17 ; 50. 19 : 10. 21 : 00.

천안에서 오는차는  저수지 건너 34번국도의 주유소앞에서 타고 내린다(도경계에서).


 

 

 

 청룡사입구의 청룡사 사적비.
우측 시계탑 뒤로  부도군이 보이고 골짜기 안으로 들아가면 바우덕이 사당이 있는데 내려올때 들릴것이다.

 

 

 

 

 

청룡사 사적비.

 

 

 

 

10 ; 34. 청룡사앞.
청룡사경내는 내려올때 들리기로 하고  좌측 서광사 표지판판뒤로 오름.
전광판 좌측길이  등산로이고 우측 다리 건너가 청룡사.

 


 

 

 

서광사 진입로.

 

 

 

 

서광사로 오르면서 본 청룡사전경.

 

 

 

 

서광사 가는길.

 

 

 

10 : 55. 능선위.
좌측으로 청룡저수지,바우덕이묘 하산길.

 

 

 

 샘터.
서운산은 곳곳에 물이 있어 식수걱정은 없다.
입장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 중학교 동창들의 안부를 물어보니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떴단다.

 

 

 

 

11 ; 10/12. 서광사.
금북정맥과 양대(입장)저수지조망.

 

 


 

서광사 미룩불과 창건주 공덕비.
미륵불은 헬기로 올렸고 창건주 보명스님은 내가 토굴암에서 공부하고 있을땐 살아계셨고
우리집도 잘 아는분이라 운동삼아 가끔씩 들려가곤했었다. 

 

 

 

 

멋스러운 소나무들.
이곳을 내려간 안부에서 좌성사는 직진하는 능선을 오르고
우측으로  내원암터를  찾으로 내려갔는데 길이 없어 어림짐작으로 내려갔다.

 

 


 

11 : 38. 폐 움막터위에서 건너다 본 서운산정상,

 

 

 

 

11 : 38. 폐 움막터.
함석으로 지붕을 두른 조립식 폐가 있어 내원암터인줄 알았더니 아니다.

 

 

 


 

토굴암(서운암)에서 본 금북정맥 엽돈재(좌).

 

 

 

11 : 51/12 : 46 . 토굴암(서운암).
내가 입시공부를 했고 수양모를 만난  암자로 가끔씩 오는 암자다.종문스님과 차 마시며 담소하고.
옛날엔 조선기와를 얻은 기와집이었는데 세월이 흐른후 스레트지붕을 얻엊다.
암자앞의 고염나무며 큰 소나무와, 같이 있던 모든분들은 다 세상을 뜨셨다.

 

 

여기서 서울에서 오신  생일이 한날이며 나이가 꼭 30년차인 수양모를 만나고
그후 천안으로 가서 절을 짓고 30년을 모자관계로 지내다 1995년 작고 하셨다.
숫자가 기이하게 생일이 한날이고  내나이 18세에 48세의 어머니를 만나고
내나이 48세에 우리 큰아들이 18세때에 작고하셨다.

 

 


 

 

 

종문스님.
참선하는 선 스님이시다.

 

 

12 ; 57. 종문스님 안내로 찾아간 내원암터.

 

 


 

종문스님 안내로 찾아간 내원암터 아래는 은행나무밭이 되고.

 

 


 

주춧돌만 남은  내원암터.
내가 있을땐 허물어진 건물이 하나 있고
옆에 움박을 짓고 생식을 하며 사는 송씨라는분이 혼자 살고 계셨다.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 탕흉대에서 오는 임도.

 

 

 

 

13 : 20.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
 법당뒤에 약수가 있고 앞이 탁트여 조망이 시원하다.
내가 있을땐 창건주가 살아 계셨고
딸이 병들어 이곳 약수물을 먹고 병을 고쳤다하여 약천암아라  하였다.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
지난 여름에 들렸을때 국수공양모습.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

날이 추워  국수공양을 3월 6일까지 중단한단다.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에서 오늘조망.

 

 

 

 

좌성사(옛이름은 약천암)에서 지난 여름 조망.

 

 

 

 

13 : 25. 서운 북산리 석조여래입상옆의 정자. 앞엔 서운산성 안내판.


 

 

 

 

13 : 25. 서운 북산리 석조여래입상.

 

 


 

13 : 25. 서운 북산리 석조여래입상.

 

 

 

 

13 : 28. 엿날엔 용굴이라  불리던 바위굴.
아래는 우물,위바위밑에 굴.

 

 


 

13 ; 34. 탕흉대.
GPS 525m가 나오고 내려다 보는 조망이 시원하다.

 

 


 

13 ; 34. 탕흉대.

 

 

 

13 ; 34. 탕흉대.

 

 

 

13 ; 34. 탕흉대에서 내려다 본 안성들판.
내고향 신흥리는 좌측인데 나무에 가려 안보인다.

 

 


 

서운산성.
내가 어렸을때 가뭄이 들면 성안에 묘를 써서 가뭄이 든다하여 면민들이 몰려와 평장한 묘를 찾고
기우제를 지냈다.

 

 

 

14 : 00/13.  541.7m 밑 막걸리집(?)에서 잠시쉬어간다.
서운산을 자주찾는이들이  모임을 만들었단다.


 

 

14 : 21. 삼거리.
우측으로 은적암, 청룡사 하산길

카메라 바테리가 아웃됐다.
항상 갖고 다니는 예비 밧테리가 없어 스마트폰으로 겨우 찍는다.
집에와 보니 가방이 아닌 차고 다니 쌕 주머니에 넣어둔걸 까맣게 잊었다.

 

 


 

14 : 21. 정자에서 본 서봉.

 

 

 

 

 헬기장에서 본 금북정맥 엽돈재쪽.

 

 

 

 헬기장에서 본 청룡사.

 

 

 

 

14 ; 29. 헬기장위 금북정맥 마루금.
엽돈재가 5.3km. 정상 0.2km.


 

 

 

 

14 : 34. 서운산정상의 삼각점(진천21)과 산불감시탑.

 

 


 

서운산정상 좌측의 전망데크앞.

 

 

 

14 ; 39. 서운산 정상석과 조망데크.

 

 

 

14 ; 39. 서운산  조망데크에서 본 서봉.

 

 

 

 

14 ; 39. 서운산  조망데크에서 본 석남사 하산능선.

 

 

 

14 ; 39. 서운산  조망데크에서 본 금북정맥 이티재능선.

 

 

 

14 ; 58. 은적암.

 

 

 

14 ; 58. 은적암.
커피물과 오뎅국물.

 

 

 

14 ; 58. 은적암앞의 감나무고목들.

 

 

 


14 ; 58. 은적암에서 청룡사 하산길.

 

 


15 : 21. 좌성사에서 내려온 임도 삼거리를 만나고

 

 

 

 

15 : 33. 청룡사.

 

 

 

15 : 33. 청룡사 연혁.

 

 

 

보물 824호인 청룡사 대웅전과 앞의 삼층석탑.

 

 

 

 

보물 824호인  청룡사 대웅전.

 

 

 

청룡사 대웅전 좌측 관음전쪽

 

 

청룡사 대웅전 우측 명부전.산신각.

 

 

 

청룡사 대웅전앞의 삼층석탑.

 

 

 

보물 11-4호인 청룡사 동종 안내문.

 

 

 

 

 

보물 1302호인 청룡사 감로탱 안내문.

 

 

 

 

보물 1257호인 청룡사 영산회 괘불탱 안내문.

 

 

 

 

15 ; 44. 청룡사 부도군.
요리로 들아가면 바우덕이 사당.

 

 

 

 

 

15 ; 52. 바우덕이사당.

 

 

15 ; 52. 바우덕이사당과 바우덕이 상


 

 

15 : 59. 주차장 원점회귀.

 

 

 

'일반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창 우두산(별유산)  (0) 2007.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