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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백의종군로

이순신백의종군길1 ( 충무로 명보아트홀앞 생가터-동작대교-남태령) .

이순신백의종군길1 ( 충무로 명보아트홀앞 생가터-동작대교-남태령) .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20.9km   (5시간 10분).

                                            
서울 충무로 명보사거리 명보아트홀앞 생가터-수표교-종각역1번출구앞 의금부터-한국은행앞-염천교-
서울역공항철도-삼각지-신용산역-이촌역-동작대교-이수역-사당역-남태령역.

 

 

 일시 : 2018. 9. 30(일).


◈ 날씨 ;  하늘도 개이고  선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걷기좋음.

 

◈ 지도.

 

 

 

◈ 트랙.

 

백의1 (생가터 ㅡ 남태령).gpx

 

◈ 일정정리.

07 : 53. 천안에서 전철로 출발.

10 ; 13. 3호선 을지로 3가 8번출구.직진해 남산쪽으로

10.16/26. 명보사거리 명보아트홀앞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온길을 되돌아 간다.

10 ; 32. 을지로 3가역을 지나  관수교에서 청계천을 따라 좌측으로 간다.

10 : 35. 수표교. 서울 천주교순례길 코스 안내도와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인 이벽집터.

10 ; 45. 삼일교. 종로 2가로 가서 좌측으로

10 : 54. 종각역 1번출구앞 의금부터.  안내판.

11 : 14. 한국은행앞.

11 ; 26. 숭례문옆.숭례문 수문장교대식행렬이 지나간다.

11 ; 33. 염천교를 건너 좌측으로 롯데마트,서울역,남영역을 지난다.

12 : 12/44. 단박왕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먹고 삼각지고가교를 건너간다.

12 : 53. 삼각지역 네거리를 건너 우측 용산역쪽으로 간다.좌측은 전쟁기념관.

13 ; 10. 용산역을 지나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간다.  용산공고정문앞을 지난다.

13 ; 23. 이촌역 5번출구.좌측 건너편에 국립중앙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을 지난다.

13 : 39. 육교위로 올라서 철로와 강변북로위를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간다.

14 ; 05. 동작대교 남단. 우측 도로를 따라 올라가 4호선 현충원역앞을 지난다.

14 : 30. 이수교차로.이수나루터 표지석.우측으로 이수교를 건너 동작대로를 따라 간다.

14 : 58. 이수역 사거리.좌측으로 꺽어들어 우측 뒷길로 짐바브웨 쇼나조각공원을 지난다.

15 ; 18. 사당역.

15 ; 40. 남태령역.

16 ; 03. 남태령역에서 전철타고-금정역에서 환승-천안도착(17 ; 52).

 

충무공이순신 백의종군길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 명하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이후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고, 3일 한양을 떠나 6월 4일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 도원수부 초입까지 걸어 내려갔는데, 당시 하동을 거쳐 초계로 내려간 일정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균(元均)이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명량대첩으로 해상권을 회복했으나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의종군은 중죄를 지었지만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내린 보직 해임조치로서 직책은 없지만 장수의 신분은 유지된 상태에서 재차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로 보는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 행적.

 

정유년 4월(1597년 4월)

정유년 4월(1597년 4월

1597년 4월 1일

(신유, 5월 16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ㆍ분과 아들 울이 윤사행ㆍ원경과 더불어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봤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이순신이 술병째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二相)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1597년 4월 2일

(임술, 5월 17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매우 푸짐하게 차려왔다.

1597년 4월 3일

(계해, 5월 18일)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경기도 과천시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봤다.

1597년 4월 4일

(갑자, 5월 19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 성남 양산리) 아래에 이르니, 반자 조발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오산황천상의 집에서 기다렸다. 진위(북면 봉남리)를 거쳐서 이르렀는데,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낸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1597년 4월 5일

(을축, 5월 20일)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에 이르러 절하며 곡하고 나서,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절하고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597년 4월 6일

(병인, 5월 21일) 맑다. 멀고 가까운 친척ㆍ친구들이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풀고 갔다.

1597년 4월 7일

(정묘, 5월 22일) 맑다. 금오랑(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오므로 나는 나가 그으기 대접했다. 홍찰방ㆍ이별좌ㆍ윤효원이 와서 봤다. 금오랑은 변흥백의 집에서 잤다.

1597년 4월 8일

(무진, 5월 23일) 맑다. 자리를 깔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저녁나절에 변흥백의 집에 이르러 도사를 접대했다.

1597년 4월 9일

(기사, 5월 24일) 맑다.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가지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해주므로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니 매우 취해서 헤어졌다. 도사는 잘 마시면서도 실수함이 없다.

1597년 4월 10일

(경오, 5월 25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변흥백의 집에 가 도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1597년 4월 11일

(신미, 5월 26일) 맑다.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마음이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일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1597년 4월 12일

(임신, 5월 27일) 맑다.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초9일에 어머니와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1597년 4월 13일

(계해, 5월 28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음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어 놓고 하는 말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해암(아산 인주면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1597년 4월 14일

(갑술, 5월 29일) 맑다. 홍찰방ㆍ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하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1597년 4월 15일

(을해, 5월 30일) 맑다. 저녁나절에 입관했다. 오종수가 진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1597년 4월 16일

(병자, 5월 31일)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1597년 4월 17일

(정축, 6월 1일)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 와서 가자고 다그쳤다.

1597년 4월 18일

(무인, 6월 2일) 종일 비오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1597년 4월 19일

(기묘, 6월 3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울며 하직했다. 천지에 나 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먼저 조상의 사당에 아뢰고, 그길로 보산원(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고 있었다. 임천군수 한술이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ㆍ면ㆍ봉, 조카해ㆍ분ㆍ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장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1597년 4월 20일

(경진, 6월 4일) 맑다.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니성(공주군 니성면 읍내리)에 가니, 이 고을 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덕장이 우연히 왔다가 서로 만났다. 도사가 와서 봤다.

1597년 4월 21일

(신사, 6월 5일) 맑다.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1597년 4월 22일

(임오, 6월 6일) 맑다. 오전에 삼례역(익산군 삼례면)의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의 집에서 자다. 판관 박근이 와서 봤다. 부윤도 후하게 접대했다.

1597년 4월 23일

(계미, 6월 7일)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이실군 오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언순이다.

1597년 4월 24일

(갑신, 6월 8일) 맑다. 일찍 떠나 남원 십리 밖의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1597년 4월 25일

(을유, 6월 9일) 비가 많이 올 듯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서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1597년 4월 26일

(병술, 6월 10일)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준)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다. 금오랑(이사빈)도 와서 봤다.

1597년 4월 27일

(정해, 6월 11일) 맑다. 일찍 떠나 순천 송원(승주군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ㆍ정선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못내 간곡하다. 저녁에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정사준도 와서 원균의 망령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1597년 4월 28일

(무자, 6월 12일) 맑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고,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고 전했다. 또 말하기를,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여 데리고 가서 돌보라”고 하는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1597년 4월 29일

(기축, 6월 13일) 맑다. 신 사과(愼司果)와 방은원이 와서 봤다. 병사(이복남)도 원수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여 순천부로 들어왔다고 한다.

1597년 4월 30일

(경인, 6월 14일) 아침에 흐리고 저물 무렵에 비오다. 병마사 이복남이 아침밥 먹기도 전에 와서 보고, 원균에 대한 일을 많이 말했다.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충무공이순신홈피에서>.

 

 

백의종군길은 서울 남태령에서 삼례까지는 평택-아산 -정안을 제외하고는 삼남길과 거의 같이 가고 있어
남태령-평택쌍용자동차앞은 생략하고  평택-아산- 정안을  진행한후 정안- 삼례는 생략하고  삼례에서 다시 이어간다.
(백의종군길은 
사단법인 한국체육진흥회 (http://cafe.daum.net/cafewalk)의 트랙을 따랐다)

 

 

 

10 ; 13. 3호선 을지로 3가 8번출구.직진해 남산쪽으로

10.16/26. 명보사거리 명보아트홀앞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온길을 되돌아 간다.

 

10 ; 32. 을지로 3가역을 지나  관수교에서 청계천을 따라 좌측으로 간다.

 

10 : 35. 수표교. 서울 천주교순례길 코스 안내도와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인 이벽집터.

 

10 ; 45. 삼일교. 종로 2가로 가서 좌측으로

10 : 54. 종각역 1번출구앞 의금부터.  안내판.

 

11 : 14. 한국은행앞.

 

11 ; 26. 숭례문옆.숭례문 수문장교대식행렬이 지나간다.

 

11 ; 33. 염천교를 건너 좌측으로 롯데마트,서울역,남영역을 지난다.

 

12 : 12/44. 단박왕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먹고 삼각지고가교를 건너간다.

 

12 : 53. 삼각지역 네거리를 건너 우측 용산역쪽으로 간다.좌측은 전쟁기념관.

 

13 ; 10. 용산역을 지나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간다.  용산공고정문앞을 지난다.

 

13 ; 23. 이촌역 5번출구.좌측 건너편에 국립중앙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을 지난다.

 

13 : 39. 육교위로 올라서 철로와 강변북로위를 지나 동작대교를 건너간다.

 

14 ; 05. 동작대교 남단. 우측 도로를 따라 올라가 4호선 현충원역앞을 지난다.

 

14 : 30. 이수교차로.이수나루터 표지석.우측으로 이수교를 건너 동작대로를 따라 간다.

 

14 : 58. 이수역 사거리.좌측으로 꺽어들어 우측 뒷길로 짐바브웨 쇼나조각공원을 지난다.

 

15 ; 18. 사당역.

 

15 ; 40. 남태령역.

 

16 ; 03. 남태령역에서 전철타고-금정역에서 환승-천안도착(17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