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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평화누리길 6. (파주성동사거리-반구정-임진각) 2

평화누리길 6. (파주성동사거리-반구정-임진각) 2

                                

◈ 일시 : 2023.  05. 04(목).  2차 2박 3일 중 셋째 날. 교통사고 나서 귀가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24.7 km.  9시간 44분.


◈ 동행 : 아내.


◈ 지도.

 

 

 

 


◈ 트랙.


평화누리길6(성동사거리 ㅡ임진각)2023-05-04 055604__20230504_0556.gpx
0.1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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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정리.

 

 

06 : 03. 파주 탄현면 성동리  신데렐라 호텔 출발. 도로 따라간다.

06 : 17. 360번도로 성동사거리. 좌측은 서울. 문산 77도로. 우측은 금촌 파주시청. 횡단보도를 건너 좀 더 올라간다.

06 : 20. 평화누리길 7코스 헤이리길 문. 7코스 스템프 찍는 곳. 성동리 표지석. 장단콩거리 조형물.
          경기둘레길 6코스 평화누리길 7코스 안내도. 앞엔 파주 맛고을 음식문화거리.좌측으로 간다.

06 : 26. 언덕위. 장수매운탕집. 장단콩 두부촌 식당. 신 산경표의 한북정맥으로 보현산에서 오두산 가는 열무니고개로 
               분명 지나갔을텐데  지나간 지가 오래돼서 기억이 없다. 고개 너머로 식당들이 연이어 나온다.

06 : 34. 갈림길.좌측은 프로방스마을을 좌측으로 돌아가는 평화누리 자전거길이고 직진 길은 프로방스마을을 통과해 간다.

06 : 37. 성동리 마을회관과 경로당. 이어 프로방스마을 조형물.

06 ; 47. 정점. 언덕을 넘어간다. 좌우로  큰 건물. 넘어 쪽은  한적한 시골풍경.

06 ; 55. 좌측으로 돌아온 누리길을 만나 우측으로 가서

06 : 58. 자유로 옆길을 따라간다. 경기둘레길 6코스 이정표. 반구정 19.1km. 성동사거리 1.9km.

07 : 18. 머루랑 다래랑 집 앞에서 휴식. 

07 : 27. 간이 화장실에서 자유로로 올라 갓길을 따라간다. 현 위치 대동리. -뒤로 성동 IC  헤이리 예술마을. 통일동산 2km 표지판.

07 : 49/58. 자전거 쉼터. 잠시 쉬어간다. 덩치 큰 은행나무 가로수를 몸통만 남기고 싹둑싹둑 잘랐다.
             자전거길 파주구간(파주출판도시 휴게소 ~장남교 57km) 안내도.

08 ; 00. 민간인 통제선 지하도. 지하도 안쪽 강가 쪽엔 초병이 근무 중. 

08 : 16. 오금 양배수장. 수문 앞으로 탄포천을 건너서 우측으로 탄포천 둑길을 따라간다. 화장실과 쉼터와 운동기구.
             여기서 자전거길은  좌측 자유로로 나가 자유로옆 자전거 길을 따라간다.

08 : 27. 둑길에서 좌측으로 꺾어 오금마을을 보며 간다.

08 : 34. 오금마을. 큼직한 향나무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오금리 질오마을.

08 : 46. 좌측엔 양식장. 우측엔 오픈 예정인 애견테마파크.

08 : 51. 자유로. 자유로를 따라온 자전거길과 합류하여 자유로옆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09 : 02. 문지리 535 카페. -성동사거리 8.1km. 반구정 12km. 

09 ; 06. 자유로 갓길을 따라가며 낙하 IC 1km 표지판.

09 : 16. 우측으로 탄현국가산업단지 800m 표지판. 자전거길 쉼터. 현 위치 문지리. 반구정 11.9km. 성동사거리 8.7km.
           여기서 누리길은 우측으로 가서 88.2m 봉을 돌아서 낙하리로 나오나 진진하여 자유로옆길을 따라 낙하리로 갔다.

09 : 39. 낙하 IC 진입로인 낙하리. 88.2m을 돌아온 누리길과 합류. 누리길은 다시 마을을 지나 산으로 붙어
           파주시 스포츠센터 쪽으로 갔다가 자유로로 나오는데  아내가 산길을 힘들어해 자전거길 따라 자유로를 계속 따라갔다.

09 : 41. 길 건너 낙하리 아랫말 정류소.

09 : 43/09 : 57. 낙하리 편의점과 할머니 손두부집 앞에서 쉬고 자전거길 따라 낙하 IC진입로로 들어 자유로를 따라간다.
                        내포 IC 3.7km. 오금교 2.9km.

10 : 08. 옛 주유소와 가스 충전소. 데크길을 따라간다.

10 : 17. 파주시 환경관리센터.

10 : 23. 내포리. 내포 IC 1.7km.

10 : 29. 길밑에 쉼터. 돌아오는 누리길을 만나 자전거길을 같이 간다.

10 : 39. 문산대교와 문산읍의 아파트들이 보이고

10 : 44. 자유로 옆 자전거길 끝. 내포 IC 300m. 자유로 작별하고 우측에 있는 359번  2차선 도로를 따라간다.

10 : 55. 안골입구 사거리. 문산 쪽으로 직진하여  확포장 공사 중인 .도로를 따라간다.우측 앞쪽에 안골입구 정류소.

11 ; 03. 방촌교차로를 지나고 

11 : 13. 공사중인 임월교(거월교)를 건너간다. 

11 : 18. 임월교(거월교)를 건너 임월교 교차로. 누리길은 직전에 좌측으로 가는데 점심을 먹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나 
             시간이 좀 일러서인지 아직 준비가 안 됐단다. 반구정 5.1km. 성동사거리 15.9km.

11 : 38/12 : 19. 당동 배수장 앞 문산이레 칼국수집에서 점심(10000x2).

                녹색 울타리 안엔 고압선과 당동배수장, 경기도 방재비축창고가 있는 문산천 옆  2차선 도로를 따라간다.

12 : 30. 당동어린이공원. 긴 계단을 올라 산을 넘어간다.

12 : 38. 짓다만 폐건물을 지나  4차선 도로를 건너간다. 현 위치 당동리. 반구정 3.3km. 성동사거리 17.3km. 경기둘레길 6코스.

12 : 47. 당동고개 정류소. 4차선 도로이고 바로 앞쪽에 당동삼거리.

12 ; 50. 당동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364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12 : 54/13 : 04 시목삼거리. 좌측은 77 국도 당동 IC입구. 직진은 반구정. GS25 편의점이 있고 볼보 트럭 앞은 GS 칼텍스 주유소.

               인근에 사는 83세 노인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 나를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무릎 쪽을 범퍼에 받혀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쾅하는 큰 소리에 앞서가던 아내가 달려왔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사고자는 병원엘 가자고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없어 어디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차사진과 운전면허증, 연락처를 받고 천안에 가서 병원엘 가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이후 처음엔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더니 몇 시간이 지나니 손. 엉덩이. 팔 허리 아프고 여기저기 까지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다리는 걸을만하니 반구정. 임진각을 둘러보고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서 동여매고 집으로 와서
               사고자에게 연락하고 다음날 아침에 자생한방병원에 입원하여 2주 입원하고 지금까지 통원치료 중이다.

13 ; 13. 시목 1리 표지석. 반구정입구가 보인다.

13 : 19. 반구정 입구. 좌측으로 77 국도 지하차도를  통과한다.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문. 자전거길 반구정인증부스.

13 : 25. 황희선생 유적지 매표소. 주차장 앞에 평화누리 자전거길 안내도. 평화의 길 7코스 안내판. 평화누리길 8코스 안내판.
            율곡 습지공원 13km.  성동 사거리 20.1km. 소명재.
          淸政門을 들어서서 월헌사.   황희선생 영당. 景慕齊. 황희선생 상을 둘러보고 
         仰止臺.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본 후  방촌 황희 기념관을 둘러보고 반구정입구로 되돌아 나간다.

13 : 48. 다시 돌아온 반구정입구. 77 국도 지하차도의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문을 나가 자유로 옆  1차로를 따라간다.

13 : 56. 자전거길 쉼터. 계속 1차로를 따라간다.

14 : 18. 77 국도 지하도가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 율곡습지공원 → 시멘트농로를 따라간다. 현 위치 사목리 

14 : 22. 좌측에 임진각역이 보이고

14 : 25. 경의선 철도를 건너간다. 좌측 가까이에 임진각역이 보인다.
14 : 27. 철로와 임진각으로 가는 4차선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4차로 밑 농로를 따 간다.

14 ; 33. 임진각역 앞 77 국도 교각밑 삼거리.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좌측 임진각 관광지 둘러보러 간다.
             율곡 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 임진각 평화누리 캠핑장 1.5km. 평화누리길 게스하우스 안내도.

14 ; 36. 임진강역. 열차는 평일엔 하루 두 번 (10:50. 17 : 25) 다닌다. 토. 휴일 4번(10 ; 00. 12 : 40. 16 :10. 17 : 45)

14 : 55. 임진각 정류소. 홍대입구에서 오는 7300번 광역버스. 문산에서 오는 93-9. 파주에서 오는 058A.  058B.
          바로 뒤에 아웅산위령탑과 6.25 전쟁 납북자기념관. 미국군 참전기념비

15 : 13. 임진각 전망대. 2층인데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자유의 다리와 곤돌라. 놀이동산을 내려다본다.

15 ; 24. 임진강 독개다리. 증기기관차.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을 둘러본다.

15 : 41. 다시 돌아온 임진각 정류소.  버스는 없고 콜택시를 부르나 대답이 없다.

17 ; 25 다시 임진강역으로 가서 기다리다 전철을 탄다. 문산까지는 10분 걸리고 중간에 운천역을 지난다.

17 : 37/48. 문산역에  도착하여 경의. 중앙선 급행으로 갈아타고

18 : 45/56. 용산역 도착하여 1호선으로 갈아타고 20 : 58 천안역 도착.

 

 

1부에 이어.

 

12 : 54/13 : 04 시목삼거리. 좌측은 77 국도 당동 IC입구. 직진은 반구정. GS25 편의점이 있고 볼보 트럭 앞은 GS 칼텍스 주유소.

               인근에 사는 83세 노인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 나를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무릎 쪽을 범퍼에 받혀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쾅하는 큰 소리에 앞서가던 아내가 달려왔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사고자는 병원엘 가자고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없어 어디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차사진과 운전면허증, 연락처를 받고 천안에 가서 병원엘 가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이후 처음엔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더니 몇 시간이 지나니 손. 엉덩이. 팔 허리 아프고

          여기저기 까지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다리는 걸을만하니 반구정. 임진각을 둘러보고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서 동여매고 집으로 와서
               사고자에게 연락하고 다음날 아침에 자생한방병원에 입원하여 2주 입원하고 지금까지 통원치료 중이다.

사고현장이다. 좌측 하얀차가 사고차로 그 우측에서 사고가 났고 헤어질때 차를 뺀후 사진이다.

 

 

 

13 ; 13. 시목 1리 표지석. 반구정입구가 보인다.

 

 

13 : 19. 반구정 입구. 좌측으로 77 국도 지하차도를  통과한다.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문. 자전거길 반구정인증부스.

 

반구정을 다녀와서 갈길.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문.

 

13 : 25. 황희선생 유적지 매표소. 주차장 앞에 평화누리 자전거길 안내도. 평화의 길 7코스 안내판. 평화누리길 8코스 안내판.
            율곡 습지공원 13km.  성동 사거리 20.1km. 소명재.
          淸政門을 들어서서 월헌사.   황희선생 영당. 景慕齊. 황희선생 상을 둘러보고 
         仰止臺.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내려본 후  방촌 황희 기념관을 둘러보고 반구정입구로 되돌아 나간다.

 

 

 

 

 

 

 

 

 

 

매표소앞의 소명재. 장수황씨 재실이다.

 

 

 

 

황희선생 유적지.

 

 

방촌 기념관.

 

 

청정문.

 

 

 

고직사(좌)-월헌사-방촌영당-경모재(우).

 

월헌사.

**부조묘 ; [ 不祧廟 ]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부조묘는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부조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사당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불천위가 된 신주는 처음에 묘 밑에 설치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 근처에 사당을 지어둘 수 있게 됨으로써 부조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부조묘는 본래 국가의 공인절차를 받아야 하나 후대로 오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에 의해서도 정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방촌선생영당.

 

**황희 ; [ 黃喜 ]

조선 초 세종 대의 재상.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여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1363년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도 겸임하였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이후 형조·예조·이조·병조 등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1402년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1409년 이후 형조·대사헌, 병조(1411), 예조(1413), 이조판서(1415)를 역임하였다. 송사(訟事)문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조판서로 복귀하였고, 1416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로 전임 복귀되었다. 이어 평양 판윤을 거쳐, 1418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고향과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422년(세종 4)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의정부 좌참찬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였다.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 거쳐 1427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위 '서달'을 방면하여 파면되었다가 한달 뒤 복귀하였다. 1428년에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를 받았으며 1430년 말(馬) 1000마리를 죽게하여 투옥된 제주 감목관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1449(세종 31)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국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였다. 태종은 물론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1452년(문종 2)년에 세종묘(世宗廟)에 배향되었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모재.

 

방촌 황희선생상.

 

앙지대(좌)와 반구정(우).

 

앙지대(仰止臺).

 

 

반구정(伴鷗亭)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449년(세종 31)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반구정 옆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仰止臺)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벽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이며, 단청이 단아하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구정 [Bangujeong Pavilion, 伴鷗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앙지대에서 본 임진강.

 

앞 사진을 당겨보고

반구정.

 

87세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나와서 여생을 보낸곳.

반구정에서 본 임진각 자유의 다리.

 

방촌 기념관.

 

방촌 기념관.

 

방촌 기념관.

 

방촌 기념관.

 

 

 

영의정만 18년. 좌의정 우의정 4년하고 90세에 졸.

 

황희를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고있으나 실상은 그렇치 않다.능력은 있었으나 청백리하고는 거리가 먼 정승이었다.

 

 

13 : 48. 다시 돌아온 반구정입구. 77 국도 지하차도의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문을 나가 자유로 옆  1차로를 따라간다.

 

13 : 56. 자전거길 쉼터. 계속 1차로를 따라간다.

 

 

4 : 18. 77 국도 지하도가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 율곡습지공원 → 시멘트농로를 따라간다. 현 위치 사목리 

 

 

 

14 : 22. 좌측에 임진각역이 보이고

14 : 25. 경의선 철도를 건너간다. 좌측 가까이에 임진각역이 보인다.

 

임진강역.

 

14 : 27. 철로와 임진각으로 가는 4차선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4차로 밑 농로를 따 간다.

 

 

 

14 ; 33. 임진각역 앞 77 국도 교각밑 삼거리.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좌측 임진각 관광지 둘러보러 간다.
             율곡 습지공원  10.1km. 반구정 2.9km. 임진각 평화누리 캠핑장 1.5km. 평화누리길 게스하우스 안내도.

 

 

 

 

14 ; 36. 임진강역. 열차는 평일엔 하루 두 번 (10:50. 17 : 25) 다닌다. 토. 휴일 4번(10 ; 00. 12 : 40. 16 :10. 17 : 45)

 

경의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운천역과 도라산역 사이에 있다. 2001년 9월 30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영송이 이곳에 진을 구축하고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격파하여 철군하자 의주에 파천하였던 선조대왕이 이곳에 이르러 강변 모래사장에서 제를 지내고 충신들의 명복을 빌며 통곡하였다하여 이 강을 임진강으로 불렀다. 새마을호, 통근열차가 운행되며 여객,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강역 [臨進江驛, Imjingang Station] (철도역 정보)

 

 

 

 

마정교에서 본 끊어진다리.

미얀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

 

**버마암살폭파사건 ; [ ─暗殺爆破事件 ]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각 정류소와 6.25 전쟁 납북자기념관.

 

 

14 : 55. 임진각 정류소. 홍대입구에서 오는 7300번 광역버스. 문산에서 오는 93-9. 파주에서 오는 058A.  058B.
          바로 뒤에 아웅산위령탑과 6.25 전쟁 납북자기념관. 미국군 참전기념비

작품명 새천년의장.

 

 

 

 

 

미국군 참전비.

 

 

망배단.

 

**임진각 국민관광지

군사분계선에서 7㎞ 남쪽에 위치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임진각 국민관광지는 6·25전쟁의 비극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을 위해 1972년에 세워진 임진각은 경기평화센터로 운영되고 있는데 북한의 생활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비디오도 상영하며 3층의 전망대에서는 망원경을 통해 북한 땅을 좀 더 가까이 조망할 수 있다.

 

임진각 뒤편의 망배단은 설, 추석 명절이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차례를 지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과 경의선을 달리던 열차가 달리고 싶은 철마라는 이름의 카페와 함께 서 있고 미군참전비, 임진강지구 전적비, 버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 등도 돌아볼 수 있다. 특히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773명이 자유를 찾아 걸어서 귀환했던 자유의 다리를 직접 건너보는 체험도 할 수 있으며 대형 잔디 언덕과 야외공연장이 있어 가족 단위 나들이 코스로 추천할 만하다.

 

15 : 13. 임진각 전망대. 2층인데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자유의 다리와 곤돌라. 놀이동산을 내려다본다.

 

임진각 전망대

임진각 전망대.

 

 

임진각 전망대에서 본 자유의 다리.

 

임진각 전망대에서 본 곤돌라.

 

임진각 전망대에서 본 놀이동산과 공원.

 

임진각 전망대에서 본 동영상.

 

 

 

 

 

자유의 다리.

문산 시가지 북쪽 2km 부근에 있는데 예전에는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고도 불렀다.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통로이며, 원래 경의선(京義線)의 철교였던 것을 도로교로 개조(하행선 철교를 개조, 상행선은 6 ·25전쟁 때 파괴)한 것이다. 전쟁 초에 북한군에게 빼앗겼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도로 빼앗고, 이때 전사들이 ‘자유의 다리’라고 외쳤다.

휴전 협정이 조인된 후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던 국군과 유엔군 1만 2773명의 장병이 이 다리를 건너왔다.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함께 6 ·25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이 다리는 7 ·4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지나다닌 길목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의 다리 [Bridge of Freedom, 自由의 다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5 ; 24. 임진강 독개다리. 증기기관차.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을 둘러본다.

 

 

돈 받는다.

 

 

15 : 41. 다시 돌아온 임진각 정류소.  버스는 없고 콜택시를 부르나 대답이 없다.

 

 

17 ; 25 다시 임진강역으로 가서 기다리다 전철을 탄다. 문산까지는 10분 걸리고 중간에 운천역을 지난다.

 

17 : 37/48. 문산역에  도착하여 경의. 중앙선 급행으로 갈아타고

18 : 45/56. 용산역 도착하여 1호선으로 갈아타고 20 : 58 천안역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