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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일반산행

홀대모 2017 봄 모임 순창 백방산(667.8m).

 

홀대모 2017 봄 모임 순창 백방산(667.8m).

 

일시 : 2017. 4. 22~23(일).  홀대모회원 26명.

 

장소 : 1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 갱비 이근배님댁.

               2일 산행. 하리 갱비댁-백방산(667.8m)- 소백산-옥녀봉-낙덕정-갱비댁 원점회귀(8.4km에 4시간9분).

◈ 지도.

 

 

홀대모 2017 봄 모임 순창 백방산(667.8m).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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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랙.

순창 백방산-옥녀봉.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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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정리.

4/22.

15시경 천안역에서 태백산 이한원님과 수강산 이선우님을 만나 승용차로 출발.
T 맵으로 네비를 찍으니 187km에 2시간 40분이 걸린단다.
태인 TG로 나가 21번 국도 타고 호남정맥 개운치고개를 넘어 갱비님집에 도착하니
5시 반인데 족구대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서 아침에 출발한 팀은 길이 많이 막혔다는데 우리는 별 막힘없이 잘 왔다.
반가운 산우님들만나 담소하며  즐기다 저녁먹고 찜질방에서 1시간여 땀빼고 취침.

2시에 잠이 깨서 뜨끈한 찜질방에서 다시 50분,
05시 반에 기상하여 또 찜질방에서 땀을 뺏는데 찜질방이 다 그렇고 그렇치 생각했는데
다녀와서 보니 보통 찜질방과는 확실히 다른 효혐이 있다.
(지맥하면서 참 많은 찜질방에서 잤는데 효과는 다른듯하여 언제 시간되면 한번 더 가고싶다)

 

4/23.

07 : 42. 아침식사후 단체사진 찍고 백방산-옥녀봉 산행에 나셨다.

07 : 53. 중리마을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 생가터. 전 민주당 대표 김종인씨의 할아버지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고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가들의 무료변론활동을 했다.

07 : 58. 중리마을회관을 지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옥녀봉과 백방산을 보며 간다.
           처음 계획은 좀더 가서 사창마을 뒤능선을 타고 백방산으로 갈 생각을 했는데 길이 없어 수정했단다.

08 : 03. 투구봉 갈림길에서 준희님은 투구봉으로 가시고 우리는 우측 아랫길로 간다.

08 : 15. 창동제 우측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로 든다.

08 ; 23. 싸리재안부.우측 431.5m삼각점봉에서 온길은 묵었다. 바로 위의 묘지에서 우측으로 성주봉(533m)을 바라본다.

08 :47. 된비얄을 올라섰다.바위위에 올라섰고 백방산이 저만치 올려다 보인다.

09 : 16. 전망바위.다시 된바얄을 올라섰다. 성주산과 뒤로 용추봉, 세자봉,회문산쪽과 올라온 싸리재쪽을 둘러본다

09 : 19. 우측으로 서마제와 추령봉쪽이 보이고 이어 복룡재,502.5m으로 가는 급 내림길엔 표지기가 많이 걸려있다.

09 : 21/37. 백방산(栢芳山. 667.8m) 넓은 헬기장에 산불초소와 산불감시카메라.
            막힘없는 조망으로 내장산 장군봉에서 백암봉을 거쳐 추월산,천치재로 돌아가는 호남정맥을 둘러본다.

09 ; 47. 백방산을 내려와 갈림길에서 앞에 옥녀봉이 보이나 우측으로 간다.

10 ; 02. 소백산(540.1m).좌로 꺽어 내려간다.직진능선은 장대봉을거쳐 동산저수지로 이어진다.

10 : 12. 경주 최후인묘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10 ; 17. 행주기씨묘를 지나고.

10 ; 24.내송고개 세멘길 .좌측 창동제에서 우측 내송으로 가는고개라 내송고개라 적엇다.
          밭을 가로질러 빼곡한 잡목숲을 갱비님이 걸어둔 감마로드 표지기따라 나무터널을 올라간다.
           

10 ; 50. 된 비얄 올라선 전망좋은 너럭바위.옥녀봉이 올려다 보이고 내려갈 낙정정 뒤로  추월산과 대법원가인연수관이 보인다..

10 : 57/09. 옥녀봉(530.9m). 새벽에 다녀간 신경수님의 흔적에 먼저 올라오신 준희님이 표찰을 달아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정상에선 조망 없고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11 ; 43. 추령천 절벽위의 낙덕정(樂德亭).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자주 찾아 성리학을 가르친곳이다.

11 : 51, 다시 돌아온 갱비님집.

13 ; 15. 다슬기 수제비로 점심먹고  태백산 이한원님과 수강산 이선우님과 동승하여 집으로 출발.

 

갱비님집.

 

 

갱비님집.

 

찜질방.
4평기준으로 6명이 누울수있는 크기인데
외벽의 흙벽돌은 물을 섞지않고 흙으로만 찍어 만들어 숨쉬가가 불편하지 않단다.
바닥공사만 하는데(아주 비싼 재료를 깔았다는데 재료 이름은 까먹었다) 1000만원정도 든단다.

 

 

찜질하는데도 순서가 있어  발바닥-배-등순으로 한다.시간은 40분정도.

암도 좋아져 간 사례가 있을 정도로 효혐이 있다기에 하룻밤 자는동안 3번을 들락거렸는데
다녀와서 보니  몸이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다.

지맥하며 왼만한 도시의 찜질방은 다 묵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찜질방을 설렵했는데 목욕하고 그냥 취침만했지 몸에 좋은줄은 몰랐다.

 

 

다음날  아침식사후 산행준비하고
앞산은 답동리 구산마을 뒷산으로 호남정맥 525.7m인듯.

 

 

왼쪽  멀리 호남정맥 고개위에 대법원가인연수관(가인은 김병로선생의 호다).
그 우측 뾰족봉이 호남정맥의 심적산(711.3m)이고, 우측능선은 634.6m-556m-삼송교).

 

 

  단체사진.
죽천, 신경수님등 몇 분은 새벽에 가시고.

 

 집뒤 세멘길따라 백방산-옥녀봉 산행 시작.

 

07 : 53. 중리마을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 생가터.

 

 

전 민주당 대표 김종인씨의 할아버지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고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가들의 무료변론활동을 했다.

호인 가인(街人)은 길거리사람 즉 평범한 사람 범부(凡夫)라는 뜻이다.

김병로선생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둘째아들 김재열(金載烈.1913~1944 )의 아들이 전 민주당대표 김종인씨이고,
셋째아들 김재욱의 사위가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과 신민당부총재를 지낸 이택돈씨이고,
김병로선생의 사위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김문평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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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가이다.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신으로, 본관(本館)은 울산(蔚山)이다. 조선 말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金相熹)의 아들이며,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5대손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며, 일제 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악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한국민주당의 정책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初代)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대법원장 퇴임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두루미가에 흰고무신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그는 우리나라 사법의 화신이요 법조계의 큰 스승(師表)과 같은 존재다.
청빈과 강직, 의연한 자세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기틀을 다졌으며 또한 단연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꼽힌다.
가인이 1953년 10월 제1회 법관훈련 회동에서 당부한 「법관의 몸가짐론」은 지금도 법조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금과옥조로 회자된다.

그것은 첫째 세상사람으로 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음주를 근신해야 되겠다는 것, 셋째 마작과 화투등 유희에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것, 넷째 어떠한 사건이든지 판단을 하기 전에 법정 내외를 막론하고 표시해서는 안되겠다는 것, 다섯째 법률지식을 향상시키고 인격수양을 해야 하겠다는 것 등등이다.

이같이 그는 법관의 올바른 몸가짐이야말로 사법부 독립의 결정적 요소로 생각했다. 그의 올곧은 자세야말로 이승만 정권의 갖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원동력이었다.

며느리의 부탁을 받고 손자의 중학교 입시결과를 알아 보러 학교에 갔던 가인의 비서관이 혼났던 일화는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그의 추상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법대 최종고 교수의 표현대로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워 놓은 터주요 어른」이었던 가인은 1888년 1월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가인의 15대 할아버지는 호남의 거유(巨儒) 하서(河西) 김인후요, 아버지 상희(相熙)씨는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지냈다. 어머니 고씨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

2대 독자였던 가인은 어린 시절 무척 외롭게 자랐다. 여섯살 나던해 할아버지가,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그래서 8살이던 1896년 집안의 기둥이던 할머니 박(朴)씨가 가인을 위해 독서당을 세워 한문공부를 시켰다.

이어 1899년 네살 위인 연일(延日) 정(鄭)씨를 신부로 맞았으나 이듬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12살 나이에 집안의 가장노릇을 해야했다.

가인은 1902년부터 2년여 동안 당시 성리학의 대가였던 간재 전우(田遇)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6세 되던 1904년 개화지 목포로 옮겨 일신(日新)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분개하여 자살할 것을 생각했으나 그만두고 귀향, 순창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에 가담하는등 두차례에 걸쳐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9년 이웃 전남 담양군 창평으로 집을 옮긴후 고정주(인촌 김성수의 장인)가 세운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속성과 6개월을 마치고 22세 되던 191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대학 법과 청강생으로 등록했으나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明治)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1915년 일본대학 및 명치대학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대학원 과정까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교수로 부터 일본변호사 시험 권유를 받았으나 조선인은 응시자격이 없어 포기하고 만다.

이 해에 귀국, 경성전수학교(서울 법대 전신) 조교수로 발령을 받고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 법대 전신)에도 출강한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 취득을 위해 1년 동안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32세되던 1920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대동단사건을 비롯 김상옥사건, 조선공산당사건, 6·10만세, 옥구군 소작쟁의, 원산노동자 파업등 1백여건 이상의 변론을 맡아 「민족변호사」또는 「사상변호사」로서 열변을 토하였다. 특히 백두산 인근 2백여호를 집단학살한 펑펑고을 화전민사건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현지에 내려가 일본의 만행을 파헤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대구학생비밀결사, 광주학생사건, 단천농민학살, 간도공산당 사건과 안창호 변론 등에 나서게 된다.

이같은 변론과 함께 1924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이사장, 1930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으로 선출되어 국내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축을 이룬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가인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내리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가족을 데리고 은거, 농사를 지으며 수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해방이 되자 가인은 송진우·백관수 등과 함께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여운형 등 건준세력과의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다. 이어 미군정 및 남조선과도 정부의 사법부장 자리를 맡았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 9년4개월 동안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재임중 가인은 법전편찬사업을 주도하고 법원의 체계를 세우는데 심혈을 쏟았다. 판결을 둘러싸고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면서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나갔다.

이처럼 청빈하고 지조가 높았던 가인도 퇴임후 정치에 투신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4·19혁명의 불길 속에서 자유법조단을 결성, 뛰어든 1960년 7·29 선거에 고향 순창에서 민주당의 홍영기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게다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정치를 군인에 맡길수 없다하여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는등 야당 단일화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병석에 눕게 된 가인은 1964년 1월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수유리에 유택을 모셨다.

 

김종인의 아버지 金載烈(1913~1944 )

1913년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1932년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큐슈(九州)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 사이인 1936년에 이필기 여사와 결혼하여 종은(鍾恩), 종현(鍾賢) 자매와 아들 종인(鍾仁) 3남매를 낳았다.

그 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변호사 시보를 마친 후, 변호사 개업을 하기 직전에, 그것도 해방을 불과 1년 앞둔 해인 1944년에 병마로 사망하였다. 아들 종인이 겨우 만 4세이던 때였다.

김재열의 요절은 가인 김병로에게 ‘참척(慘慽) 의 슬픔’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사람은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지금도 가인 김병로의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 하면서, “김재열 변호사가 살았다면 가인의 대를 잇는 큰 법조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한다.

 

 

김병로金炳魯) 선생 생가터를 지나 마을회관앞에서 뒤돌아 본 갱비님집쪽 심적사능선.
고도가 260~270m대 준 고냉지라 이 일대 배추종자값만도 20~30 억원이란다.

 

 

7 : 58. 중리마을회관을 지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옥녀봉(좌)과 백방산(우0을 보며 간다.

 

08 : 03. 투구봉 갈림길에서 준희님은 투구봉으로 가시고 우리는 우측 아랫길로 간다.

 

두릅밭인데 잎이 피는걸 방지하려고 종이컵을 씌웠단다.
저앞 초지 같은곳은 고사리밭이란다.

 

 

08 : 15. 창동제에서 본 옥녀봉.

 

 

08 : 15. 창동제 우측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로 든다.

 

 

 저위가 싸리재안부.

 

08 ; 23. 싸리재안부.
우측 431.5m삼각점봉에서 온길은 묵었다. 바로 위의 묘지에서 우측으로 성주봉(533m)을 바라본다.

 

 

바위도 나오고 된비얄을 올라가는데 길은 그런대로 나 있지만 좋지는 않다.

 

된비얄을 올라 바위위에 올라서 우측으로 본 장군봉(608m. 좌내장산 장군봉이 아니다)과 성주봉(우).
추령천 중간쯤에 하서 김인후가 살았던 춘몽재가 있을텐데...

여기는 철이늦어 이제야 진달래꽃이 피었고 도로가엔 아직 벚꽃이 남아있다


 

09 : 16. 전망바위에서 본 옥녀봉(앞)과 심적산(우측앞)과 우측 뒤로 추월산.

다시 된바얄을 올라섰다.
 성주산과 뒤로 용추봉, 세자봉,회문산쪽과 올라온 싸리재쪽을 둘러본다

 

09 : 16. 전망바위에서 본 성주봉(533m)과   우측 뒤로 용추봉, 세자봉,회문산.

 

 

09 : 16. 전망바위에서 본 성주봉(533m.좌측 살짝)과  뒤로 용추봉, 세자봉,회문산.
우측 아래가 싸리재이고 위가 원래 올라올려고 했던 431.5m.432.5m봉.

 

 백방산(栢芳山. 667.8m)에서(사진은 에이원님이).

 

 

9 : 21/37. 백방산(栢芳山. 667.8m) 을두고 호남정맥이 삥돌아가고 있어
  내장산 장군봉에서 백암봉을 거쳐 추월산,천치재로 돌아가는 호남정맥을 둘러본다.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시계반대방향으로 1.
신선봉(우)-내장산군-백학산-동산저수지(좌).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시계반대방향으로 2.
백학봉(651m.우)-곡두재-대각산(529.9m.좌)

동산저수지  좌측능선은 소백산에서 내려간 -510.6m-장대봉.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시계반대방향으로 3.
맨뒤로 병풍지맥 용구산(826.4m)인듯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4.
땡겨본 추월산(뒤)과 심적산(앞).
좌측안부 검은 건물이  대법원가인연수관.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5.
가운데 안부가 올라온 싸리재.가운데 봉 2개가 431.5m.432.5m.
그앞 끝봉이 용추산(579.4m).좌측 높은봉들은 세자봉(709.1m),여분산(773.4m),회문산(837m).
호남정맥은 사진 가운데 능선으로 ㄴ로 꺽어간다.


 

백방산(栢芳山. 667.8m) 조망 6.
좌측 성주봉(533m)과 뒤로 멀리 세자봉(709.1m),여분산(773.4m),회문산(837m).


 

09 : 21/37. 백방산(栢芳山. 667.8m) 넓은 헬기장에 산불초소와 산불감시카메라.


 

 백방산(栢芳山. 667.8m) 정상 바로 아래의 절벽위에서 본 조망 1


 서마제 뒤  호남정맥의 추령봉(우측 오뚝한봉. 572.7m).
사진 가운데 벌건 개간지앞으로 서마제 물이 우에서 좌로 빠져 나오고,
벌건 개간지 넘어가 호남정맥 추령이다.

사진중앙은 513.3m,바위 우측능선이 502.5m 삼각점봉 능선으로 호남정맥에 닿는다.
맨좌측 제일높은봉이 내장산군의 주장인 신선봉(763.5m)이고 그앞 둥근보은 화개산(621m)이고
그뒤 고만고만한 봉들이 신선봉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능선인듯 ,


,

 백방산(栢芳山. 667.8m) 정상 바로 아래의 절벽위에서 본 조망 2

 신선봉(763.5m. 우)-내장산군-백학봉(좌)-동산저수지.

 

 

 백방산(栢芳山. 667.8m) 정상 바로 아래의 절벽위에서 본 조망 3
소백산(540.1m.맨좌측)-510.6m-장대봉(444.1m)-동산저수지.

벌목하고 고사리를 심을려나보다..

 

 

09 ; 47. 백방산을 내려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며 본 소백산(앞).

 

 

09 ; 47. 백방산을 내려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며 본 옥녀봉(좌), 심적산-추월산(우측뒤).

 

 

10 ; 02. 소백산(540.1m)에서 뒤돌아 본 백방산(栢芳山. 667.8m).
좌로 꺽어 내려간다.직진능선은 장대봉을거쳐 동산저수지로 이어진다.

 

 

10 ; 02. 소백산(540.1m)에서 좌측으로 본 싸리재,창동제,삼각점봉과 뒤로 회문산군.

 

10 ; 02. 소백산(540.1m).

 

 

10 ; 24.내송고개 세멘길 .
좌측 창동제에서 우측 내송으로 가는고개라 내송고개라 적엇다.
          밭을 가로질러 빼곡한 잡목숲을 갱비님이 걸어둔 감마로드 표지기따라 나무터널을 올라간다.

10 ; 24.내송고개

 

 

10 ; 24.내송고개

 

 

10 ; 50. 된 비얄 올라선 전망좋은 너럭바위에서
옥녀봉이 올려다 보이고 내려갈 낙정정 뒤로  추월산과 대법원가인연수관이 보인다.

 

내려갈 낙정정(사진 좌측 봉긋한 숲)뒤로  추월산과 대법원가인연수관(고개위)이 보인다.

 

 

구산마을뒤로 호남정맥 525.7m,514.5m와 큰부래기재(좌측끝).

 

 

이번 모임 장소를 제공해주신 주인장 갱비 이근배님.

 

10 : 57/09. 옥녀봉(530.9m)에서.
새벽에 다녀간 신경수님의 흔적에 먼저 올라오신 준희님이 표찰을 달아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정상에선 조망 없고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 1
뒷줄은 성주봉,앞줄기 좌측긑이 싸리재,우측이 431.5m삼각점봉,432.5m.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 2.
좌측이 432.5m.우측 중리마을 건너편이 호남정맥 천치재.
사진 가운데 좌측봉이 정광사뒤 591.5m봉 그앞 흐릿한봉이 용추봉,
사진 좌측 뒷산들이 용추봉에서 북으로 갈라진 세자봉,여분산, 회문산.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 3.
호남정맥 큰부래기재(385.6m.좌)-525.7m-514.5m.


 

 몇발짝 내려온 바위군에서 조망 5.
호남정맥 고개의  대볍원 가인연수관= 심적산(711.3m.앞봉)-추월산(뒷봉) 

 

 

 정병훈 하문자님부부.

 

 

 

11 ; 43. 추령천 절벽위의 낙덕정(樂德亭).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을사사화(1545)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3km정도 떨어진 점암촌에 은거하며 강학당인 훈몽재(訓夢齊)를 짓고 후학들에게 성리학전수했는데
자주 이곳을 찾아 강론과 담소를 즐기던 곳이다.
불을 땔수있는 방이 있고 방문을 열면 사방이 트여있는 정자다.

 

 

하서(河西) 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李滉)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낙덕정(樂德亭)에서 본 추령천 .

 

 

 낙덕정(樂德亭)에서 본 상송교와 대법원가인연수관.

 

상송교앞에서 본 낙덕정(樂德亭)과 옥녀봉.

 

 

일하다  잠시쉬며 나무밑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우측집이 갱비네집.

 

 

11 : 51, 다시 돌아온 갱비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