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산행/일반산행

마곡산 솔바람길 (주차장-마곡사-활인봉(423m)-백련암-주차장) .

마곡산 솔바람길 (주차장-마곡사-활인봉(423m)-백련암-주차장) .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9.2km(4시간 55분).

 

◈ 일시 : 2021. 09. 05 (일).

 

◈ 지도.

 

 

트랙.

마곡사솔바람길2021-09-05_0950.gpx
0.05MB

 

카카오맵으로 트랙보기.

 

 

일정정리.

 

아내가 광주자생병원에서 무릎과 허리가 아파 44일간 입원했다
퇴원한지 20여일이 돼서 운동삼아 가까운 마곡사를 다녀왔는데
전코스를 돌기엔 다소 무리가 되지않를까싶어  단축해서 돌고 와서 좀 아쉽다.

다리가 다 나아 다시가면 마곡사 표지석있는 삼거리에서 좀 더 도로따라 올라가  
은적암-백련암-삼거리-활인봉-나발봉-삼거리에서우측 마곡사(천왕문)-삼거리에서  군왕대-
산신각-성보박물관-삭발바위-마곡사-극락교-천왕문-해탈문-영산전-주차장으로 나오면 되겠다.

 

09 : 50. 마곡사주차장. 상가를 지나 마곡사가는 도로따라 들어간다.

10 ; 00. 일주문.태화산 마곡사다.

10 ; 03. 매표소. 대인 3000. 경로무료. 바로앞의 마곡사안내판앞에서 좌측 "백범김구 명상의 길"로

10 ; 13. 살짝 올라선 능선위의 백범김구흉상. 우측으로 능선을 내려간다.

10 : 22. 마곡사 들어가는 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 7개 산사. 안내도.

10 : 25. 마곡사입구 삼거리. 커다란 돌 표지석. 우측으로 내려간다. 직진하면 백련암.대원암.

10 ; 27. 작은 다리건너 해탈문. 좌측 영산전은 내려올때 보기로 하고 직진해 천왕문을 지난다.

10 ; 36. 마곡천을 건너는 극락교다리를 건너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과 대적광전(보물802호).우측은 심검당.

10 : 41. 대적광전뒤 대웅보전(보물 802호).

10 : 50. 대적광전 좌측에 있는 백범이 출가하여 기거하던 백범당과 백범이 심은 기념식수.
응진전. 조사전을보고 백범당 뒤에 있는 백범명상길을 따라 산자락길을 간다. 안내도는 봐도 모르겠다.

11 : 04. 김구선생 삭발바위. 김구선생이 삭발한 곳이란다.
11 ; 07. 다리건너 조금 올라간 영은교.불교문화연구원 1km.
나발봉을 거쳐 돌아 내려오기엔 아내가 무리일것같아 뒤돌아 가며 삭발바위와 성보박물관앞을 지난다.

11 : 16. 국사단(산신각). 자장. 범일. 도선. 보조(지눌)등 4분의 국사영정을 모셨다. 능선위로 좀 올라가 있다.

11 : 27. 영산전(보물 800호).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판은 세조의 글씨란다.
11 : 36/55. 해탈문앞으로 나와 다리를 건너 우측에 있는 정자에서 두유와 미숫가루. 과일로 간식을 먹고

11 : 56. 백련암가는 도로옆의 활인봉가는 등산로 초입. 등산안내도 있지만 이걸보고 가늠하긴 어렵다.
활인봉 1.6km.나발봉 3.9km. 계곡길로 올라 경사기 급한 계단을 몇번이나 올라간다.

12 : 42. 벤취와 간이 주막이 있는 능선삼거리. 우측은 백련암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좌측에 활인봉이 높게 올려다 보인다. 활인봉 0.6km. 영은암 1.1km.

13 : 00. 활인봉(423m). 정상석과 사각쉼터. 나발봉. 1.2코스 2km.대웅보전 .3코스 3.6km.
잠시 편한길을 가다가 급한 내림길로 계속 내려가서는 다시 완만한 능선을 간다.

13 ; 34. 안부. 좀전부터 간간히 시커먼 구름이 지나가며 빗방을이 떨어진다.우측 하산길로 내려간다.
앞 나발봉 1코스 0.8km. 뒤 활인봉 3코스 1.2km. 우측 생골2코스 이정표.

13 : 43. 생골 세멘길.우측으로 간다. 대웅보전 1.5km. 국사봉이 건너다 보인다.
세멘길따라 내려가며 개량종인지 밤나무밭의 밤송이가 유달리 크다.

13 : 58. 백련암입구.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백련암이 130m라는데 지나칠수없어 우측 고개를 넘어간다.

14 ; 05. 백련암. 법당과 요사채. 뒤엔 산신각이 있는 조촐한 암자다.
김구선생이 은거했던곳으로 선생의 어룩을 적은 흉상이 있고 법당뒤로 활인봉가는 등산로가 있다.

14 : 13. 다시 돌아온 백련암입구.도로따라 내려가며 토굴암. 죽림원가는 삼거리를 지난다.

14 ; 20. 불화를 그린 화승으로 유명한 금호당 약호 안내판과 불모비림.

14 : 25. 은적암입구를 지나 산행시작점인 활인봉등산로 입구.이어 마곡사입구.

14 : 39. 마곡천 데크길따라 내려온 매표소.

14 : 44/15 :12. 상가지구 단골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5000*2)먹고 귀가.

 

 

09 : 50. 마곡사주차장. 상가를 지나 마곡사가는 도로따라 들어간다.

 

10 ; 00. 일주문.태화산 마곡사다.

 

10 ; 03. 매표소. 대인 3000. 경로무료. 바로앞의 마곡사안내판앞에서 좌측 "백범김구 명상의 길"로

 

10 ; 13. 살짝 올라선 능선위의 백범김구흉상. 우측으로 능선을 내려간다.

 

10 : 22. 마곡사 들어가는 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 7개 산사. 안내도.

마곡사 가람배치도.

 

세게문화유산에 들어간 7산지승원.

 

10 : 25. 마곡사입구 삼거리. 커다란 돌 표지석. 우측으로 내려간다. 직진하면 백련암.대원암.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입니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 납니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10 ; 27. 작은 다리건너 해탈문. 좌측 영산전은 내려올때 보기로 하고 직진해 천왕문을 지난다.

해탈문. 좌측 흥성루안에 영산전.

法界로 들어가는 해탈문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입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 즉 법계(法界) 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원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문인 마곡사 천왕문이 박공지붕집인 데 비해 해탈문은 추녀 밑에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 맞춘 도구를 여러 개 배치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입니다. 

 

천왕문.

호법신장 나투신 천왕문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마곡사의 두 번째 문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곡사의 첫 번째 관문인 해탈문은 겹처마 팔작지붕집이지만 천왕 문은 1출목 익공식(翼工式) 공포(拱包)를 짜 올리고 전후면 공포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설치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입니다.

 

10 ; 36. 마곡천을 건너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799호)과 대적광전(보물802호).우측은 심검당.

극락교.

범종루.

소원지.다른사찰에선 리본으로 했는데 여기는 요런모양이다.

보물 799호인 마곡사오층석탑과 보물 802호인 대광보전. 뒤로 보물 801호인 대웅보전.

 

우측의 심검당.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다.청빈한 그의 인품을 보여주듯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검'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2군·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 등을 썼다.

 

 

오층석탑.

 

나라의 기근 막는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보물 제799호로, 일명 다보탑 또는 금탑이라고도 부릅니다.

탑의 2층 네 면에는 소박한 솜씨로 ‘사방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청동제인 풍마 등이 조 성되어 있습니다. 라마식 보탑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원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으로 모든 방향을 포괄하는 상징 이기도 하므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님이 영원히 거주한다는 불신상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불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의 확대는 시간을 횡으로 가르고 다시 공간적으로 투영되어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서 현재의 다방불, 천불, 삼 천불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은 상태에 있다는 내재불 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오층석탑에는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을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 내 려오고 있습니다.

 

 

앉은뱅이 업장 소멸한 대광보전


앉은뱅이,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세세생생 회향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릴 삿자리를 짜기 시작하면서 앉은뱅이로서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 자비광명을 얻게 만 된다면 이생을 넘어 세세생생 보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맹세하고 부처님께 의지하며 생활한지도 어느덧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도 주제 넘는 소원을 품었던 터라 더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가진 업보가 그 얼마나 큰데 감히 부처님께 그런 소원을 빌다니! 얼마나 더 공덕을 쌓아야 그 동안 지은 억겁의 죄업을 다 씻을 수 있을 것인가, 슬프도다 슬프도다.’


지난 100일 동안의 기도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도 참회요, 둘째도 참회였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 될수록 그는 걷게 되는 것을 염원하기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핀 들꽃이 소중하고 그것이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 무엇에건 감사하게 되었다. 들꽃과 함께 호흡하고 나를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부처님께 감사했다. 일체의 삼라만상에 부처님의 자비를 회향하겠노 라고 다짐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렇게 100일이 채워졌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삿자리가 완성되었다. 그는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부처님께 기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가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그는 그 파란 하늘과 푸른 숲, 무심히 흐르는 마곡천을 바라보며 부처 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또 다짐했다. 이 같은 부처님의 자비를 하늘과 바람과 나무와 숲,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향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누는 삶, 자비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대광보전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전설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당 안에 삿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1788년에 중창되었으며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광보전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건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특이하게 봉안되어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 진리의 몸이 온누리에 두루 비치는 광명의 빛을 내어 모든 이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대광보전의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788년 조성된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용왕과 용녀, 사천왕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비로자나 부처님 뒷벽에는 18세기 후반 조선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백의수월관음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는 관음보살님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대광보전 현판

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이다.

글씨체는 약간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 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대광보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정면에서 봣을때 좌측(동)을 보고 계신다.

.

대광보전에서 본 대웅보전.

 

대광보전기둥.

 

10 : 41. 대적광전뒤 대웅보전(보물 802호).

아들 점지해 주는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대웅보전!


무슨 말이냐구요?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통층으로 전각의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가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설화의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 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이지요.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는다고 일렀다고 합니다. 이런 재미난 전설로 인해 지금도 이 싸리나무 기둥은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있습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아낙이 많아서이지요.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마곡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때의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도 부릅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에서 대광보전.

대웅보전기둥의 주련.

 

10 : 50. 대적광전 좌측에 있는 백범이 출가하여 기거하던 백범당과 백범이 심은 기념식수.
응진전. 조사전을보고 백범당 뒤에 있는 백범명상길을 따라 산자락길을 간다. 안내도는 봐도 모르겠다.

 

 백범이 출가하여 기거하던 백범당.

마곡사와 백범 김구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아직도 파랗게 자라고 있다.


백범선생은 마곡사를 떠난 지 근 50년 만에 돌아와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라는 원각경에 나오는 문구를 보고 감개무량하여 이 향나무를 심었다 한다.

백범 선생은 동학교도에서 승려, 독립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이르기까지 투쟁과 투옥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언제나 해방된 조국, 하나 된 조국의 뚜렷한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절한 생을 흠모하는 것이다.


백범 선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인천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그곳을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가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백범일지에는 그의 출가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사제(師弟) 호덕삼(扈德三)이 머리털을 깎는 칼(削刀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출가 당시의 착잡했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고 지금은 마곡사와 공주 시청이 이곳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그곳에서 마곡천 절경을 굽어보는 마곡사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또한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을 두어 마곡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1시간가량 산보하기 좋다.


백범 선생이 지냈던 백범당에는 백범선생의 진영(眞影)과 1946년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백범 선생 뒤로는 왼쪽에는 완장을 찬 좌익이 서있고 오른 쪽에는 넥타이를 맨 우익이 서있다. 이렇듯 백범선생은 사상 보다는 하나 된 조국을 더 원하였다.
사진 옆에는 백범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는데 그것은 서산대사의 선시로 다음과 같다.

 

백범이 심은 향나무.

 

 

 

응진전.

 

 

응진전에서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조사전.

 

백범당 뒤에 있는 백범명상길을 따라 산자락길을 간다. 안내도는 봐도 모르겠다.

 

솔바람길 안내도.

 

11 : 04. 김구선생 삭발바위. 김구선생이 삭발한 곳이란다.

 

 

11 ; 07. 다리건너 조금 올라간 영은교.불교문화연구원 1km.
나발봉을 거쳐 돌아 내려오기엔 아내가 무리일것같아 뒤돌아 가며 삭발바위와 성보박물관앞을 지난다.

영은교.

 

삭발바위.

 

 

11 : 16. 국사단(산신각). 자장. 범일. 도선. 보조(지눌)등 4분의 국사영정을 모셨다. 능선위로 좀 올라가 있다.

 

 

 

산신각을 내려오며 본 대웅보전.대광보전.

 

명부전.

 

명부전

업장 소멸 명부전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을 말하니 무섭다구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자연의 이치는 생(生)을 간직한 모든 이에게 평등합니다. 죽음 역시 그렇지요.
당신은 업보와 윤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 확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명부전은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의 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기도 처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까지 다 구제할 것을 서원하신 보살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지장보살님께 기도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업보와 죄를 소멸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은 특히 군왕대의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참회 정진에 특히 좋은 정진 터입니다.
마곡사의 명부전은 1939년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는 전각입니다. 건물에는 지장보살님을 중앙 불단에 모시고 있으며 좌우에 ‘ㄷ’자형의 불단을 만들어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님을 모셨습니다.

명부전.

 

11 : 27. 영산전(보물 800호).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판은 세조의 글씨란다.

영산전

영험의 기운 응집되어 있는 영산전

“예가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태화산 군왕대의 혈 자리라.”


마곡사의 영산전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특히 어진 정승과 용맹스러운 장수를 만들어 낸다는 군왕대의 모든 기운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의 큰일을 할 인재 배출을 원하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소원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영산전은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50년에 중수돼 현재 보물 제80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영산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불 7구가 남아있습니다.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인 방서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영산전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당시의 광경인 영산회상을 재현해 모신 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 혹은 500나한을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마곡사의 영산전에는 한 가운데에 과거칠 불을,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과거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일컫습니다. 

 

 

영산전주련

영산전. 현판은 세조의 친필이란다.

영산전 현판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러 쓴 현판이라고 '마곡사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현판에는 '세조어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영산전.

 

영산전앞 매화당.

 

11 : 36/55. 해탈문앞으로 나와 다리를 건너 우측에 있는 정자에서 두유와 미숫가루. 과일로 간식을 먹고

11 : 56. 백련암가는 도로옆의 활인봉가는 등산로 초입. 등산안내도 있지만 이걸보고 가늠하긴 어렵다.
활인봉 1.6km.나발봉 3.9km. 계곡길로 올라 경사기 급한 계단을 몇번이나 올라간다.

활인봉가는 등산로초입. 여기서 올라가는것보다는 도로따라 조금 가서 은적암-백련암으로 가는게 낫겠다.

 

 

 

 

마곡사전경이 우측 아래로 살짝 보인다.

 

12 : 42. 벤취와 간이 주막이 있는 능선삼거리. 우측은 백련암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좌측에 활인봉이 높게 올려다 보인다. 활인봉 0.6km. 영은암 1.1km.

삼거리.

삼거리. 우측은 백련암. 좌측은 활인봉.

 

13 : 00. 활인봉(423m). 정상석과 사각쉼터. 나발봉. 1.2코스 2km.대웅보전 .3코스 3.6km.
잠시 편한길을 가다가 급한 내림길로 계속 내려가서는 다시 완만한 능선을 간다.

활인봉

 

활인봉.

 

 

 

13 ; 34. 안부. 좀전부터 간간히 시커먼 구름이 지나가며 빗방을이 떨어진다.우측 하산길로 내려간다.
앞 나발봉 1코스 0.8km. 뒤 활인봉 3코스 1.2km. 우측 생골2코스 이정표.

안부.

 

생골내림길.

 

13 : 43. 생골 세멘길.우측으로 간다. 대웅보전 1.5km. 국사봉이 건너다 보인다.
세멘길따라 내려가며 개량종인지 밤나무밭의 밤송이가 유달리 크다.

우측 대웅보전 1.5km로.

 

생골건너로 450봉(중)과 우측뒤로 무성산.

 

뒤 돌아 본 나발봉.

13 : 58. 백련암입구.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백련암이 130m라는데 지나칠수없어 우측 고개를 넘어간다.

백련암입구.

 

14 ; 05. 백련암. 법당과 요사채. 뒤엔 산신각이 있는 조촐한 암자다.
김구선생이 은거했던곳으로 선생의 어룩을 적은 흉상이 있고 법당뒤로 활인봉가는 등산로가 있다.

백련암.

 

백련암.

 

백련암.

 

백련암 백범김구선생은거지.

 

 

백련암대웅전뒤 활인봉등산로입구.

 

화링봉가는길에 있다는 마애불.(사진은 빌려왔다).

 

백련암에서 내려다 본 450m봉.

 

14 : 13. 다시 돌아온 백련암입구.도로따라 내려가며 토굴암. 죽림원가는 삼거리를 지난다.

토굴암. 죽림원가는 삼거리

 

14 ; 20. 불화를 그린 화승으로 유명한 금호당 약호 안내판과 불모비림.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회화 작업에 종사하는 승려를 화승 또는  금어·화사·화원·화공·양공·편수·비수·불모라고한다.

화승들은 사찰에서 불화(佛畵)를 그리거나 일반회화 화가로 활동했다. 승려 출신의 화가로는 중국 송대(宋代)의 양해(梁楷)나 목계(牧谿), 청대(淸代)의 팔대산인(八大山人)이나 홍인(弘仁)이 그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행(奇行)과 더불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선보이며 일반회화나 불화 혹은 선화(禪畵)를 그림으로써 중국회화사상 뚜렷한 행적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의 화승은 불화를 그리는 승려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특히 조선시대의 불가(佛家)에는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승려들이 집단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들을 화승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승려가 처음부터 불화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황룡사(黃龍寺) 「노송도(老松圖)」로 유명한 솔거(率居)는 평민 출신이었으며, 1323년작 「수월관음도」를 그린 서구방(徐九方)이나 1310년작 「수월관음도」를 그린 김우문(金祐文) 등은 내반종사(內班從事: 고려시대 관직이름. 종9품에 해당)에 봉직하는 관료화가였다. 조선시대 들어와 「관경변상도」(1465년)를 그린 이맹근(李孟根)이나 「관음32응신도」(1550년)를 그린 이자실(李自實) 역시 나라에 봉직하는 관료 화가였다. 이렇듯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일반화가들이 불화 수요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 승려들이 불화 제작을 전담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단체로 사찰을 옮겨 다니며 불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함으로써 화승이라는 직업군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화승에 대한 호칭은 매우 다양했다. 고려시대에는 근화(謹畵)·화수(畵手)·화(畵) 등으로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훨씬 다양해져 화원(畵員, 畵圓)·화사(畵師, 畵士)·금어(金魚)·용면(龍眠)·편수(片手)·화공(畵工)·비수(毘首)·채화(彩畵)·회사(繪事)·경화(敬畵) 등이 쓰였다. 이 용어들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따라 쓰이는 비중의 편차가 다른데, 조선 전기나 18세기 초반까지는 ‘화원’이나 ‘화사’ 로 빈번하게 기재되었으나, 18세기 중후반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금어’와 ‘편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많은 화승이 배출되면서 걸출한 화승들이 활약하였는데, 18세기에는 의겸(義謙)·세관(世冠)·임한(任閑)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 오면 화승의 수효는 더 많아졌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이 자신의 주요 거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승 [monks artist, 畵僧]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불모비림(佛母碑林).

 

 

14 : 25. 은적암입구를 지나 산행시작점인 활인봉등산로 입구.이어 마곡사입구.

 

 

14 : 39. 마곡천 데크길따라 내려온 매표소.

 

14 : 44/15 :12. 상가지구 단골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5000*2)먹고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