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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일반산행

2009년가을 지리산 칠불사와 대성골의 단풍.

2009년가을 지리산 칠불사와 대성골의 단풍.

칠불사 대웅전 좌측의 아자방(亞字房).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도상거리 9.1km 약 8시간(시간은 의미없음).

칠불사-의신-대성동-대성골-남부능선-음양수샘-세석대피소.

◈ 일시 : 2009. 10. 21(수).

◈ 날씨 :전형적인 가을날씨로 산행하기엔 최적의 날씨이나 시계는 썩 좋지는 않음.

◈ 인원 : 집사람과 둘이서.

◈ 지도 :월간산지도 1/65000.

의신-대성골-세석-삼신봉-쌍계사 지도.
클릭하면 원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일정정리.

23 : 57. 천안에서 여수행 무궁화호 기차 탐.구례구 16200원.
03 : 25/40. 구례구역에서 구례행 버스탐(1000원).
03 : 50/06 : 30. 터미널앞 동바리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을 먹으며 시간을 죽임.
06 : 40. 쌍계사 거쳐 신흥가는 군내버스를 탐.(쌍계사 2050원).
07 : 10~08 :00. 쌍계사에서 택시로 칠불사 들려 의신으로 감.(쌍계사 택시 011-584-3005. 박영복.25000원)
08 : 00/20.의신마을 지리산 역사관(시간이 일러 전시실 안은 구경못함).
08 : 20. 벽소령 산장집앞에서 산행시작.(세석 9.1km,대성동 2.5km,벽소령 8.6km,쌍계사 9km.신흥 4.9km,칠불사 10.8km).
09 : 30/50. 대성동. 두 집이 영업을 하고 있음.도토리 묵 한 모 먹고 감(6000원).세석 6.6km,의신 2.5km.
10 : 40. 첫 번째 계곡 철다리를 건너감.(세석 5.2km,의신 3.9km).
11 : 32. 두 번째 게곡의 철다리를 건너감.
11 : 37. 직진해 계속 계곡을 따라가는길은 영신봉 아래 영신대로 가는 길이고 세석쪽은 우측 비탈길로 올라감.
12 : 30. 지능선위.좌측으로 꺽어 오르며 우측으로 삼신봉가는 남부능선이 건너다 보임.
13 : 23. 남부능선 삼거리.우측 삼신봉 5.3km,의신 6.9km,좌측 세석 2.2km.
13 : 31. 조망이 일품인 전망대 암봉위.지리주능선가 세석산장,삼신봉줄기가 다 보임.
14 : 00/30. 음양수 샘(표고 1450m).발씻고 휴식.세석 1.2km,쌍계사 15.3km,청학동 8.8km,의신 7.9km.
15 : 00. 세석대피소.이용료 8000원 .모포 1매 1000원.

◈ 산행그림.

칠불사-의신마을.

쌍계사에서 골따라 약 5km를 더 들어가면 신흥마을이 있고 여기서 계곡은 Y자로 갈라져서
우측으로 가면 의신마을을거쳐 벽소령이나 세석으로 가고
좌측으로 들어가면 계곡은 다시 Y자로 갈라져 좌측 목통골은 목통마을을 지나 화개재로 올라가고
우측골을 따라 올라가면 범왕마을이 나오고 범왕마을에서 좌측능선길따라 올라가면 칠불사가 나오는데 쌍계사에서 약 10여km 거리다.
칠불사 뒤 능선을 따라 3시간쯤 올라가면 토끼봉에 이르는데 지금은 출입금지구역으로 발이 묶여있고
목통골에서 화개재도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있어 일부러나 찾아가지 산행을 겸해서는 찾아가기가 어렵다.

교통편도 마땅찮아 칠불사로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두 번 있는듯싶고 신흥마을에서도 5km나 되니 걸어가긴좀 먼거리다.
칠불사를 둘러보고 대성골이나 벽소령으로 오르려면 신흥으로 다시 나와서 우측 의신으로 가야한다.
칠불사에서 신흥이 6km,신흥에서 쌍계사는 4.1km이고 의신까지가 5km이고 의신에서 세석은 9.1km,벽소령은 6.8km이다.

칠불사(七佛寺) 선설루(善設樓)에 걸린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 쓴편액.

칠불사(七佛寺) 전경.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소재한 칠불사는 지리산(智異山) 토끼봉 남쪽 기슭 아래 해발 830m의 산등성이,
사방으로 치솟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옛날에는 나는 새가 아니면 찾아 들 수 없었던 곳에 자리잡은 이곳은
창건 설화(創建 說話)에 의하면 수로왕(首露王) 56년인 서기 97년, 가야(伽倻)의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옥(許黃玉)사이에 태여난
왕자 10명 중에서 일곱 왕자(王子)가 외삼촌(外三寸)인 보옥 선사(寶玉 禪師)를 따라 출가하여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한후 3년간 수도하다가
수로왕(首露王) 60년(101)에 이곳으로 옮겨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참선을 계속했으며,
마침내 수로왕(首露王) 62년(103 : 신라(新羅) 파사왕(破娑王) 24년) 팔월 보름날 성불(成佛)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하자
이를 기뻐한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절을 크게 짓고"칠불암(七佛庵)"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이 위치한 "범왕리(凡王里)"의"범왕(凡王)"이란 말은 일곱 왕자(王子)가 수도를 할 때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찾아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붙은"범왕(梵王)"이 변한 이름으로
지금의 목통 마을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허황옥(許黃玉:왕비)이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 : 지금의 정금리 대비(大比)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칠불사 대웅전

벽송(碧松),부휴(浮休),추월(秋月),서산(西山),인허(印虛),무가(無價),월송(月松),금담(金潭),대은(大隱),초의(艸衣) 등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대표적인 고승들이 거쳐갈 만큼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의 위치를 누렸던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의 전란을 맞아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830년에는 아자방(亞字房) 건물인 벽안당(碧眼堂)이 역시 실화(失火)로 소실되었으며
한국전쟁(韓國戰爭) 당시에도 폐허로 변했는데, 현재는 비록 쌍계사(雙磎寺)에 소속된 암자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칠불사(七佛寺)’로 그 이름을 바꿀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승병장(僧兵將) 서산 대사(西山 大師)는 차(茶)를 좋아하여
이곳에서 나는 차를 애용했으며, 이곳에 주석하면서 법당 수리에 전념했다고한다.

칠불사 대웅전 좌측의 아자방(亞字房).


아자방터(亞字房址 : 경남 유형문화재 제144호)

칠불사(七佛寺)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또한 칠불사(七佛寺)를 유명하게 만든 독특한 온돌방 선원(禪院)인 이곳은
신라(新羅) 제6대 지마왕(祗摩王) 8년(119)에 지은 건물로서 본래 이름은 ‘벽안당(碧眼堂)’이었으나,
신라(新羅) 제52대 효공왕(孝恭王 : 재위 기간 897~911) 때 신비한 기술로 온돌을 잘 놓아 ‘구들 도사(道士)’로 불리던
담공 화상(曇空 和尙)이 구들을 놓으면서 ‘버금 아(亞)’자(字)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내부 구조(內部 構造)

길이 9m?너비 8m 정도로 중앙에 깊이 70㎝의 십자로를 두었고 사방 둘레의 높은 부분은 수도처로,
낮은 부분은 통로로 쓰이는 이곳은 한꺼번에 50명의 스님이 벽을 보고 둘러앉아 참선할 수 있는 내부 구조가 매우 특이한 온돌방이다.

남북 장방형으로 놓인 정면 5칸,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남쪽 두 칸은 부엌이고 북쪽 세 칸은 방인데,
부엌과 방의 높이차가 1.8m나 돼 불길이 잘 들고,부엌 벽 중앙부에 큰 부뚜막 아궁이를 두어 불길이 부챗살 방향으로 들어가
남북으로 놓인 줄고래를 통해 북벽 밖 중앙에 있는 굴뚝 쪽으로 나가게 설계되어있다.
보통 10월 보름쯤 겨울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는 때에 일곱 짐이나 되는 뗄감을 세 개의 아궁이에 한꺼번에 넣고 불을 지펴놓으면
다음 해 정월 보름 해제(解制)할 때까지 항상 같은 온도로 따뜻했다고 한다.

현재(現在) 모습
안타깝게도 1948년 12월 초순 여순항쟁사건(麗順抗爭事件)으로 인한 빨치산과 군경토벌대 간의 전투 와중에
대웅전(大雄殿)인 보광전(寶光殿)과 함께 소실된 후 그 터만 겨우 보존되고 있다가 1982年에 복원(復元)되었다,

관련 전설(關聯 傳說)
이곳의 신비(神秘)를 더해 주는 이야기는 많이 전해오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 방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비를 캐기 위해 한 스님이 굴뚝을 뚫었다가 가산(家産)을 탕진하고도 못 고쳤다는 것과
구들장 하나를 들어냈다가 덮었으나 그 자리만은 다시는 더워지지 않았다는 것 등인데,
그리하여 1979년 세계건축협회(世界建築協會)에서 펴낸『세계건축사전(世界建築辭典)』에 수록되는 영예(榮譽)도 얻었다.

뒤에서 본 아자방(亞字房)과 굴뚝.

아자방(亞字房)내부는 유리창 넘어로나 겨우 볼 수 있고
이그림은 안내판에 있는 내부 모습이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

문수보살은 대승(大乘)의 보살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문수사리(文殊師利)만수시리(滿殊尸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 등으로도 음역되는데,
문수와 만수는 묘(妙),사리, 실리는 "두(頭)"덕(德)"길상(吉祥)"등의 뜻이므로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말이 된다.
이 보살은 석가가 열반한 후 인도에 태어나"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하였다고 하며, 항상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처럼 표현되어 왔다.
《반야경(般若經)》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다.
때에 따라서는 경권(經卷)을 손에 쥔 모습으로 조각되고 묘사되는 일이 많았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보현보살(普賢菩薩)과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보현이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활동할 때, 문수는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즉, 이 보살은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 권현(權現)으로서 보살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전설적으로 이 보살은 중국의 산시성[山西省] 우타이산[五臺山]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강원도 오대산에 있다고 하여 지금도 그 곳의 상원사(上院寺)는 문수를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예불하며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어사 박문수(御使 朴文秀) 관련 전설(관련 傳說)
이곳에는‘어사 박문수(御使 朴文秀)’와 관련된 전설(傳說)이 전해오고 있다.
어사(御使)로 내려온 박문수(朴文秀)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의 1백여 사암(寺庵)을 폐사(廢寺)할 구실을 찾으려고
칠불암(七佛庵)을 찾았다가 어린 동승(童僧)에게 법문(法文)만 잔뜩 듣고 내려왔고,
그리하여 그 닷새 뒤 박어사(朴御使)는 하동현감(河東縣監)과 함께 스님들의 신통력을 시험할 한 가지 계책을 짜냈다.
“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달리게 하여 못 달리면 절을 폐쇄하고 달리면 선량(禪糧)을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하동현감(河東縣監)의 통보를 받은 스님들은 산중회의(山中會議)를 소집했으나
묘책(妙策)을 찾지 못한 채 좌선(坐禪)으로 문수기도(文殊祈禱)만 올렸다.

마침내 시험 날짜가 되어 현청의 넓은 뜰에 박어사(朴御使)와 현감(縣監), 육방권속과 화개동천(花開洞天) 스님들이 모였다.
그때 칠불암(七佛庵) 스님 가운데 동승(童僧) 한 명이 나서 현감(縣監)에게 합장하고
“소승이 작은 재주를 보여드릴까 하오니 대감께서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마시오.”하고 말했다.
동승(童僧)은 다시 박어사(朴御使)에게 물었다.
“이 목마(木馬)를 타고 허공을 날면 무슨 상을 주겠습니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마.”
“이후로는 불법(佛法)을 진실로 믿는 불자(佛子)가 되시오.”
그런 뒤 동승(童僧)이 목마(木馬)에 올라타 “자, 어서 달려라.”하고 말하자,
목마(木馬)는 현청의 뜰을 열 바퀴 돈 뒤에 하늘로 둥둥 떠올라 북쪽으로 사라졌다.
“거룩하셔라, 문수동자(文殊童子)여!” 스님들은 일제히 외치며 무수히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천비연(天飛淵)<퍼온사진과 글>
이곳은 칠불사(七佛寺) 입구에서 150m 정도 아래 지점에 위치한 연못으로 ‘영지(影池)’라고도 하는데,
한때는 연못가에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할 정도로 갈대가 무성했었다고 하며
한국전쟁(韓國戰爭) 이후에는 매몰되기도 하였다고한다.

이곳은 허황옥(許黃玉:김수로왕의 왕비)이 수도하고 있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 운상원(雲上院:칠불사 얫이름)을 자주 찾았지만
오빠인 장유 화상(長遊 和尙)이 “아들들의 불심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다가,
하루는 “네 아들들이 성불(成佛)했으니 만나 보라”며 이 연못을 가리키자,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곱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고 하는 곳이다.

대성골이나 벽소령 들머리인 의신마을의 선학정(仙鶴亭).
길아래 계곡가에 선학정이 있고맞은편길윗쪽이대성골입구다.

선학정(仙鶴亭)위에서 벽소령쪽으로 본 의신마을.
마을끝에 지리산 역사관이 있다.

지리산 역사관.
의신분교터에 세운 지리산 공비토벌 역사관인 모양인데 이른 시간이라 문을 안 열어서 내부는 못봤다.

지리산 공비토벌루트 안내도.

.

지리산 역사관에서 본 의신마을과 삼신봉능선.

◇ 의신마을-세석산장.

세석가는 대성골입구의 안내도.

벽소령산장 우측 마당을 지나면 산길이 나온다.
남의집 마당을 통하지 않고 올라갈 수 있게 국립공원에서 입구의 길을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산길로 올라서며 뒤 돌아 본 의신마을.
저뒤 능선이 토끼봉에서 연하천으로 가는 능선이리라.

산길로 올라서며 본 의신에서 신흥으로 내려가는 계곡모습.

대성동 마을.
한때는 50여 가구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단 두 집이 등산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대성동 마을.

대성동 마을.
천안의 국회의원인 양승조의원이 지난 7월에 다녀가며 남긴글이 걸려있다.
아직 참을 먹긴 이른 시간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도토리묵 한 모 먹고 쉬어갔다.

대성동마을을 떠나며.
의신이 2.5km,서석이 6.6km란다.

첫번째 계곡을 건너고.이정표(세석 5.2km,의신 3.9km).

바위에 겨우 뿌리를 내린 저 어린 단풍나무도 곱게 물들었다.

대성골 단풍.

대성골 단풍.

두 번째 다리를 건너고.

대성골 단풍.

영신대가는 계곡길도 뚜렸하다.
여기서 우측 산 비탈길로 올라야한다.

구례에서 버스를 같이타고 온 젊은이가 있었는데 우리가 칠불사를 들려오는동안 먼저 올라왔는데
저녁늦게서야 세석산장엘 들어오길래 왜 늦었는가 물어보니
여기서 계곡따라 계속 올라가는 바람에 4시간을 알바하고 왔단다.

대성골 단풍.

뭔가 했더니 온습도 측정장비란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서부터는 계속 오르막길이라 힘이 든다.

계곡에서 지능선위까지 꼬박 1시간을 올려채야한다.
삼신봉가는 능선인줄알지만 삼거리까진 다시 50분을 더 올라가야한다.

지능선위의 단풍.

남부능선 삼거리.
이제야 삼신봉가는 남부능선위에 올라섰다.우측 삼신봉 5.3km,의신 6.9km,좌측 세석 2.2km.

여기서 부터는 기복이 심하지 않은 능선길이라서 편하다.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영신봉과 세석산장.좌측 허연곳이 음양수샘이다.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촛대봉과 시루봉.
두봉사이 펑퍼짐한곳에 못이 있으리라.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남부능선과 삼신봉 3봉.
좌측봉이 외삼신봉,가운데 뾰족하고 앝은봉이 삼신봉,우측 뾰족뾰족한봉이 내삼신봉.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대성골과 뒤로 왕시리봉.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반야봉(가운데 둥근봉)과 노고단(좌측).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본 칠선봉.

또다른 조망좋은 암봉위에서 땡겨 본 세석산장과 거림골 단풍.

음양수 샘(표고 1450m).
시간이 널널하니 발씻고 휴식.세석 1.2km,쌍계사 15.3km,청학동 8.8km,의신 7.9km.

음양수 샘(표고 1450m)위의 제단.

음양수 샘(표고 1450m)위의 제단에서 뒤 돌아 본 삼신봉능선.

촛대봉과 세석철죽 이야기.

세석산장.
참 많은 추억이 있는 산장이다.
지금의 현대식 산장보다는 왼쪽에 있는 지금은 취사장으로 쓰고 있는 옛 산장의 부뚜막에 나란히 앉아
꾸뻑꾸뻑 졸며 밤을 지새우던 생각이 난다.

태양열로 전기를 써서 그런지 지금은 전보다 난방도 뜨뜻하게 잘되고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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