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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ㅎ 기맥,지맥.

호미지맥 3구간[사일고개 -마석산-토함산-추령(4번국도)].

호미지맥 3구간[사일고개 -마석산-토함산-추령(4번국도)].


마석산(磨石山.531m)을 내려오면서 본 문제의 토성소류지-北吐里-순지마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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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도상거리 25.49km(실산행거리 15.96km. 차량이동 9.53km.)(총 6시간 38분).

사일고개(904번도로)-1.86km(33분)-270.8m-2.9km(60분)-마석산(531m)-2.5km(75분)-북토리앞 다리-1.1km(14분)-순지마을 태화식품앞-
3.57km(대략 6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나 차량으로 이동함)-원고개-2.26km(차량이동)-감산사입구-3km(55분)-토함산목장앞-3.7km(차량으로 이동)-
석굴암주차장-1.6km(28분)-토함산-3km(60분)-추령(310m.4번국도 터널위).

◈ 일시 : 2009. 2. 1(일).

◈ 인원 : 요맥회원 8명(요맥 강형태 대장님. 양천 심용보님. 김한수님.정송자님.산바람 최덕조님.홍완섭님 .현주환님. 그리고 나)

◈ 날씨 : 날이풀려 봄날같이 푸근함.

◈ 지도 : 1 : 25000.입실. 불국.1:50000. 울산. 불국사. 영진5만 : p 416 경주. 417 경주.

호미지맥 3구간(사일고개-마석산-토함산-추령) 지도 1. 누르면 확대됩니다.

호미지맥 3구간(사일고개-마석산-토함산-추령) 지도 2. 누르면 확대됩니다.

호미지맥 3구간(사일고개-마석산-토함산-추령) 지도 3. 누르면 확대됩니다.

◈ 일정정리.(10 : 45~17 : 23. 6시간 38분).

06 : 45. 사당역출발.
07 : 35. 천안통과.
10 : 40/45. 사일고개(904번도로). 흥부휴게소와 주유소.
10 : 54/11 :07. 329m봉 아래 갈림길.329m정점 넘어의 전망대바위 다녀옴.
11 : 15. SG공장 아래 도로.904번도로-제내리를 잇는도로.
11 : 31. 270.8m 삼각점.50여m 아래에서 우측으로 내려감.
길주의.


11 : 49. 366m봉.작은 돌탑있고 오름길이 경사심함.마석산이 건너다보임.
11 : 54. 안부. 청소년수련마을 시설물뒤로 마석산의 전모가 보임.
12 : 23/29. 마석산 오름길의 전망바위.뒤로 온길과 토성소류지쪽이 잘보임.
12 : 38/40. 마석산(磨石山.멧돌산.531m).정상표석과 준희님의 이름표.좌측 묘지쪽은 남산쪽으로 가는길.우측으로감.
길주의.
12 : 43. 마석산의 상징인 큰 바위.
12 : 49/51. 420.4m 삼각점(울산 401)바로앞이 Y자 갈림길.우측으로 감.
12 : 53. 갈림길에서 표지기 많은 우측으로 내려왔으나 직진하는 화살표방향이 맞을듯함.
길주의.
12 : 57/8. 전망바위서 북토리,제내리,순지마을등 주변을 돌아봄.
13 : 28. 새로조성중인 전원주택지(육의당과 마루금으로 추정되는 축사 중간쯤됨)
13 : 38/40. 제내(堤內)마을 육의당(六宜堂)과 토성소류지 수문.


13 : 45. 축사앞.
13 : 55. 북토리(北吐里) 들어가는 다리.
14 : 05. 순지마을앞 인공수로.
14 : 09. 순지마을 태화식품우측도로.
14 : 10~14 :40. 차량으로 영지를 거쳐 원고개로 가서 괘능마을 도로따라 감산사앞까지감.

14 : 40.감산사(甘山寺)입구
15 : 30.삼태지맥 분기점.
13 : 35/42. 토함산목장앞 도로토함산 솔밭가든.우측은 감포,좌측은 불국사가는길.
13 : 42~15 : 48. 차량으로 석굴암 주차장입구까지감.


15 : 54. 석굴암입구.매표소 좌측 이정표에서 산길로 듬.
16 : 06/7. 성화채화지.
16 : 13. 추령갈림길.(추령 2.7km.토함산 0.3k. 석굴암 주차장 1.1km)
16 : 17/22. 토함산(吐含山.746m).정상표석2개와 조망도와 삼각점(불국사 24).
길주의.다시 추령갈림길까지 오는 것이 안전함.


16 : 26. 다시 추령 갈림길.산허리를 돌아 내려감.
16 : 31. 포수우물 180m.추령 2.6km 이정표.주능선만남.비탈길을 내려감.
16 : 35. 앞 봉에서 전망트임. 뒤로 토함산내림길과 추령까지 갈길을 살펴봄.
16 : 48. 내려온 안부에서 좌우로 하산길 있음.
16 : 51. 앞봉엔 이정표(추령 1.5km.토함산 1.5km)있고 좌측으로 내려감.
16 : 57. 다음봉에서 우측 좋은길이 아니고 좌측으로 내려감.이후는 능선길만 따르면됨.
길주의.
17 : 18. 작은 봉을 두 개쯤 넘어가면 앞에초록색 통신탑이 나오고 우측 로프따라 5분쯤 내려가면 추령임.
17 : 23/27. 추령(310m). 발밑으로 4번국도 터널이 지나가고 터널위 고개위엔 백년찻집이란 고급차집이 있음.


17 : 27/50. 경주시내로 이동
17 :50/18 :30. 저녁식사.
18 : 30. 경주출발.
21 : 44. 천안도착.

◈ 산행후기.

오늘구간은 인공수로로인해서 지맥산줄기가 없어진 구간을 지나야한다.어디를 어떻게 지나던 물을 건너야한다.
낙남정맥의 가화강에선 양쪽으로 파낸 흔적이 그대로 있어 강을 건너 산줄기를 이어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이곳은 위에 소류지를 만들고 얕은구릉지는 논으로 변하고 인위적인 수로를 만들어서 원래의 지맥줄기는 알수없고
다만 여려정황들을 종합하여 원래의 지맥은 이럴 것이라고 추측만 할 분이다.
그러니 각자의 보는 견해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곳이다.

원래의 계획은 사일고개에서 토함산목장앞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다음구간에 토함산목장앞에서석굴암까지 3.7km를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길도 별 의미가 없고
원고개에서 괘릉마을을 지나 감산사 삼거리까지 2.26km도 마을길만 따르니 별 의미가 없어 이곳을 차량으로 이동을하여
오늘 추령까지 간다면 호미지맥 전구간을 7구간에서 6구간으로 한구간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하고 계획을 수정하여 추령까지 가기로 했다.


산행을 하다보니 2시가 돼서야 순지마을 태화식품앞에 오게됐고 시간상 순지마을에서 원고개를 산행하기엔 시간이 없어
바로 감산사입구까지 차로 이동하며 대신 영지를 차로 지나가면서라도 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산줄기를 타면서 맥을 빼먹고 건너뛰어보기는 처음인데 200m도 안되는 이름없는 능선 1시간 빼먹는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것도 아니고
그정도는 알바를해서 건너갈수도있는 거리인데 전체일정을 7구간에서 6구간으로 하루를 땡긴다니 큰 무리는 아니라 생각하고 그렇게 갔다.

10 :40/45. 사일고개(904번도로)흥부휴게소와 주유소가 있다.

10 : 54/11 :07. 329m봉 아래 갈림길.
사일고개(904번도로)에서 10여분 올라가면 329m봉 정점전에 좌측으로 내려가야하는데

표지기가 많이있어 어려움은 없고 건너다 보이는 329m봉 넘어쪽에있는 전망바위를 다녀오는 것이 좋다.왕복 10여분 걸린다.

사일고개(904번도로).
흥부휴게소와 주유소 사일가든이 있다.

사일고개(904번도로)에서.
좌측부터 강형태 요맥회 회장님. 양천 심용보님.산바람 최덕조 총무님.홍완섭님.정송자님.이번에 새로 오신 현주환님.나.

329m봉 아래 갈림길.
여기서 지맥은 좌측으로 내려가나 바로위의 329m봉 정점 넘어에 있는 전망바위에 올라보는 것이 좋다.

329m봉 정점넘어의 전망대에서 본 366봉과 마석산(531m).

329m봉 정점넘어의 전망대에서 본 마석산과 토성소류지와 제내리.

329m봉 정점넘어의 전망대에서 본 문제의 토성소류지-순지마을의 사라진 산줄기.
좌측 토성소류지가 보이고 우측에 순지마을이 보인다. 그뒤로 멀리 토함산이 보인다.
좌측 송전탑뒤의 하얀 축사가 보이고 사진 가운데에 북토리로 들어가는 다리도 보이고
토성소류지부터 순지마을앞으로 문제의 인공수로가 보인다.

329m봉 정점넘어의 전망대에서 본 삼태지맥과 외동읍모습.


329m봉에서 본 마석산(磨石山.531m)- 토성소류지-北吐里-순지마을-원고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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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31. 270.8m 삼각점.
갈림길에서 7,8분 내려오면 SG 공장 우측으로 내려서고 제내리로 가는 포장도로를 건너 묘포장 밭갓으로 올라 우측봉에 오면 송전탑이있고

좌측 소나무숲길로 내려서 몇분 올라가면 270.8m봉 바로아래에서 우측으로 넓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270.8m봉 삼각점은 좌측 50여 m위에있고 판독할 수 없는 삼각점 넘어쪽엔 헐벗은 묘지가 있고 좌측 아래엔 송전탑이 있다.

SG 공장앞의 사일-대전마을 도로.
앞의 묘포장갓으로 가서 우측의 송전탑봉을 올라 좌측 송전탑있는 270.8m봉에서 뒤의 366봉으로 간다.

SG 공장앞 묘포장에서 본 지나구간의 687m 꺽임봉과(우)420m봉(좌)
가운데로 골프장이 보이고 좌우로 904번도로가 지난다.

270.8m 삼각점.
지맥은 정점 50여m전에 우측으로 꺽어 넓은길따라 내려가고
정점좌측아래엔 송전탑이 있고 정점 넘어의 묘지쪽능선으로도 길이있어 자칫 혼동할 수도 있다.

366봉을 내려간 안부.
청소년 수련원인듯한 시설물뒤로 마석산이 올려다 보인다.

마석산(磨石山.멧돌산.531m) 오름길에 뒤 돌아 본 지맥모습.


마석산(磨石山.멧돌산.531m) 오름길에 본 토성소류지인근 모습.

12 : 38/40. 마석산(磨石山.멧돌산.531m).
270.8m을 내려온 안부에서 우측으로 대전마을로 가는 하산길이 있고
빽빽한 소나무숲길에 된비얄을 올라가면 작은 돌탑이 있는 366봉이고(11:49)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면 앞에 큰 건물과 뒤로 마석산이 보인다.
청소년 수련원인듯한 건물을 좌측에 끼고 돌아 오르면 첫봉엔 제일쉼터팻말(12 :06)이 땅에 떨어져있고
오름길로 들어 한참으로면 우측에 전망좋은 바위가 있어 여기서 뒤 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329봉과 270.8봉,366봉이 건너다 보이고
우측으론 문제의 지역인 토성소류지와 북토마을 순지마을이 내려다 보인다.카메라가 심통을부리기시작한다(12 :23/29)


다음봉에 올라서면 이곳이 마석산 정상인가 했더니 정상은 저만큼 건너가있고 수련원에서 붙인듯한 반환점 표시판이 있고
송이채취지역을 알리는 표지와 라일론줄이 길따라 쳐져있다.
길은 정상 우측 30여m 지점으로 올라서고 정상엔 최근(2008.11)에 울산 미봉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석이 있고
나무위엔 준희님의 마석산(멧돌산) 531m 이 걸려있다.좌측 경주남산으로 가는길엔 묘지가 하나있고 지맥은 우측으로 내려간다.

마석산(磨石山.멧돌산.531m)정상모습.
정상엔 최근(2008.11)에 울산 미봉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석이 있고
나무위엔 준희님의 마석산(멧돌산) 531m 이 걸려있다.좌측 경주남산으로 가는길엔 묘지가 하나있고 지맥은 우측으로 내려간다.

마석산의 상징물인듯한 거대한 바위와 420.8m삼각점.

12 : 49/51. 420.4m 삼각점(울산 401)바로앞이 Y자 갈림길.우측으로 감.
마석산을 내려오면 바로 마석산의 상징물인듯한 거대한 바위가 나오고 더 내려오면 묘지를 지나고
Y자 갈림길이다.두길 사이 바로앞 둔덕에 420.4m 삼각점(울산 401)이 있다.
좌측길은 면경계능선이고 우측으로 내려서 조금 나오면 우측으로 표지가 많이 걸려있고 직진하는 바위에 검은 페인트로 화살표를 그려놨다.
여기서 화살표따라 직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우린 우측으로 표지기를 따라 내려갔다.(12 :53)

12 : 57/8. 전망바위.
420.4m 삼각점(울산 401)에서 카메라가 또 심통을부려 작동이 안된다.
지난주에 봉수지맥에서도 작동이 안돼서 중요한 지점을 찍지를 못햇는데 또 그런다. 올라가면 당장 병원엘 보내던지 않되면 새로 사야겠다.
허긴 너도 참 고단하겠다.큰 카메라 다 버리고 작고 쓰기 좋은 디카로 애들이 바꿔준지4,5년동안에 25000장을 찍었으니 심통을 부릴때도 됐다.
아마도 이물질이 꼈는지몇주전부터 렌즈가 나올때때마다 삐디딕 거리더니 아예 작동도 안될때도 있다.
잠시 이넘과 씨름하는 사이에 일행들은 벌써 저앞에 가서 뒤에 내가 안보이니 부르고 있다.

조금 내려오니 앞이트여 토성소류지와 인공수로가 보이고 선답자들이 지맥마루금이라고 생각한다는 축사도 보인다.


내려온 능선은 이쯤에서 큰 줄기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 제내리쪽으로 가고 있고 한줄기는 직진해 내려가고있다.
저앞 축사를 기준삼아간다면 좀전에 삼각점밑에서 직진해 갔어야 할 듯싶으나 혼자서 되돌아가긴 그렇고
어차피 어느것이 마루금인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이니 직진해 내려가봤다.
흐릿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오니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터 닦기를 하고 있는넓은 공터가 나오고 우측 저쪽에 대웅전절집이 보인다.
터닦기 공사장밑은 대밭이 라 뚫고 나올수가없어 우측의 계곡을 건너가니 우측아래쪽에 토성소류지와 이동통신탑이 있다.
이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토성소류지도 보고 옆에 있다는 육의당도 볼겸해서 우측으로 내려갔다.

420.4m 삼각점(울산 401)에서 내려오면서 본
토성소류지=북토마을 축사-순지마을모습.

420.4m 삼각점(울산 401)에서 내려오면서 본
토성소류지-242m봉-329봉.

420.4m 삼각점(울산 401)에서 내려오면서 본
치술령781m-329봉-366봉.

420.4m 삼각점(울산 401)에서 내려오면서 뒤 돌아본 마석산(중)과 420.4m(우).
우측의 큰바위있는고까지 내려와서 우측으로 내려왔어야 될듯싶다.

전원주택지 공사장에서 올려다본 마석산.(핸드폰 사진이라 시원찮다)
앞쪽아래는 대밭이라 내려가기가 어렵다.
좌측으로 건너가면 축사쪽으로 갈것같으나 우측의 토성소류지와 육의당을 볼려고 우측으로 갔다.

13 : 38/40. 제내(堤內)마을 육의당(六宜堂)과 토성소류지 수문.
육의당(六宜堂)앞엔 사당인듯한 집이 있고 바로앞은 사일고개쪽에서 내려온 도로이고 도로건너엔 토성소류지수문과 위에서 내려온 수로가 있다.
보통 저수지는 양쪽 높은곳을 막아 그 사이의 물들을 모아 수문을통해 물이 나가게 돼있는데
여긴 ┛자로 뚝을 쌓고 뚝 우측으로 인공수로가 있고 도로가 있고 마을이 있다.
골짜기 물이 일단 소류지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만 소류지로 물을 받고 보통때는 인공수로로 흐르는것같다.

육의당(六宜堂)

육의당(六宜堂).


육의당(六宜堂)
육의당은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무신 육의당 최계종(崔繼宗:1570~1647)이 1619년(
광해군 11)에 지은 별장으로,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후손인 최해구가 소유, 관리한다.

최계종은
임진왜란 때 숙부인 최봉천(崔奉天) 및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서생포(西生浦)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승진되었으나 벼슬을 거역한 죄로 귀향을 갔고,
이곳 별장에서 일생 동안 은거하며 지냈다.

토성소류지.<요맥님 사진>
육의당(六宜堂)앞엔 사당인듯한 집이 있고 바로앞은 사일고개쪽에서 내려온 도로이고 도로건너엔 토성소류지수문과 위에서 내려온 수로가 있다.
보통 저수지는 양쪽 높은곳을 막아 그 사이의 물들을 모아 수문을통해 물이 나가게 돼있는데
여긴 ┛자로 뚝을 쌓고 뚝 우측으로 인공수로가 있고 도로가 있고 마을이 있다.
골짜기 물이 일단 소류지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만 소류지로 물을 받고 보통때는 인공수로로 흐르는것같다.

13 : 55. 북토리(北吐里) 들어가는 다리.
토성소류지에서 큰길은 신원쪽으로 가고 하천길을 따라 5분쯤 내려오며 축사앞에서 하천을 건너는 얕은 다리가 있고
축사앞에서 마루금을 가늠해봐도 역시 확실하게 어느것이 지맥줄기이다라고 단정지을만한 뚜려한 능선이 안보인다.
우측에 있는 소나무숲 두곳도 지대가높아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높이는 논배미와같은데 묘지가있어 원형그대로 남아있는것이다.
이 솔숲이 원래의 모습이라 볼수있는 것은 주변이 다 논인데 논에다 흙을붓고 묘를 쓰지는 않았을테니 원래의 모습이라할것이고
토성소류지를 만들고 모두 논밭을 만들고 인공수로를 만들적에 손을 못댄 것을 보면 이지방 세력있는 토호나 아니면 인공수로를 만든집 묘지일것이다.
10분쯤 하천뚝을 따라 내려오면 북토리로 들어가는 큰 도로가 나오고 하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14 : 09. 순지마을 태화식품 우측도로.
큰길따라 우측으로 가면 좀 높은지대인 신명산업이 나오고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순지마을이 나오지만
지맥능선이라 추정되는 인공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하천이 두 번째 좌측으로 꺽이는 지점에서 우측 순지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좌측(북)이 마루금이라 추정하며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신원쪽에서 영지쪽으로 가는 8번군도가 나오고 마을회관이 나온다.
앞엔 태화식품공장이 있어 공장 우측으로 몇발짝 내려가면 산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나오고 입구에 표지기들이 걸려있다.

축사앞에서 가늠해본 추정 마루금.

북토리(北吐里)로 들어가는 다리에서 본 마석산 내림길.<요맥님 사진>
좌측이 축사이고 우측마을이 북토리다.

이 큰 수로가 지맥마루금이라고 추정되는 인공수로다.
신산경표의 금강정맥인 익산의 미륵산에서 함라면소재지까지 장장 10여 km의 능선위에
일제시대에 만든 폭 3m 높이 2m정도되는 대형콘크리트수로에 물이 흐르고 있다.
금강의 물줄기를 퍼올려서 김제평야를 적시는 물인데 높은데 있어야 양쪽으로 물을 보낼수 있기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이곳도 얕은 구릉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토성소류지를 막아 이물로 농수로 쓸려면
지대가 좀 높은 산줄기를 따라 수로를 냈을 것이다.

몇군데 남아있는 솔숲은 전부터 묘지가 있어서 개간을 하지 않았고 이 솔숲들은 원래의 모습일듯싶다.

제방뚝에서 순지마을들어가는길.
앞에 보이는태화식품이고 어디로 가든 앞의 수로를 건너야한다.

제방뚝에서 순지마을들어가는길에 본 마석산과 북토리.<요맥님 사진>
사진 우측의 포도밭이 마루금같다.

태화식품 우측들머리 모습.<요맥님 사진>
마루금은 태화식품이 차지하고 있어 마을회관앞 도로에서 태화식품울타리를 좌측에 끼고
도로따라 우측으로 조금 나오면 좌측으로 산으로 드는 큰길이 있다.

신 산경표의 저자이신 박성태님의 이부근을 설명한 지도와 해설을 옮겨본다.

마석산 정상 바로 아래는 묘가 한기 있고 정상은 볼품이 없다.
동쪽으로 꺾어 바로 아래에 있는 석문같은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잠시쉬고 내려가서 펑퍼짐한 곳을 지나
약간 돌아가는 곳 왼쪽에 있는 420.4m봉 삼각점(울산 401/96년 재설)을 확인하고 곧 나타나는 갈림길에서는 직진한다.

조그만 돌들이 놓여있는 바위를 지나고 앞을 가로막는 바위에 이르기까지 길이 좋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내려서서 날등을 놓치지 않으면 조그만 바위사이로 내려가는 길이 잠시 끊어지기도 하지만 이내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바위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면 내려가는 능선과 오른쪽의 능선이 빤히 바라보이고 저 아래 묘지가 뚜렷이 보이는 오른쪽 능선이 주능선 같지만
끝에가서 조그만 골에 막혀 끝나는 산줄기다. 이 능선을 오르쪽에 두고 내려가면 묘에 이르고
그 앞에는 아래에서 올라온 넓은 산길이 오른쪽으로 마른 개울(10여미터만 내려가면 물이 흐르고 있다)을 건너 휘어져가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오른쪽 지능선의 묘지로 가는 길이다.
이 넓은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밀양박씨의 묘로 가야하는데 길이 불분명하다.
바로 내려서면 쇠줄를 쳐놨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몇 발 이동하면 넓은 산길이고 길 윗쪽을 바라보면 묘가 보이는데 밀양박씨의 묘다.
올라갈 때는 이 묘에서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으로 몇 발 나가서 넓은 산길을 만나 올라가게 된다.

곧장 내려가서 비닐하우스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3층집이 바라보이고 여기서 논 가운데에 바라보이는 조그만 숲 둘의 바로 앞에 있는 축사까지가 주능선이다.
3층집 직전의 밭사이로 내려가서 마을길을 만나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주능선 바로 오른쪽이고 내려가서 둑을 건너게 된다.

축사에서 둑을 건너 논 가운데 있는 소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흔적과 둑이 없다면
바로 오른쪽 골의 물이 논사이로 골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갈것이라는 것을 짐작해 보고 둑을 따라 순지마을 쪽으로 간다.
들 가운데 있는 공장건물앞을 지나 북토리로 들어가는 길의 다리를 지나고 계속 둑을 따라간다.

여기서 오른쪽의 길을 따라 공장건물를 거쳐 순지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주능선인 것 같지만
옛지형도를 보면 공장 북쪽을 휘돌아 신원마을쪽으로 내려가는 물길이 있어 능선이 끊기게 된다.
즉 이 도로는 순지마을 이르기 직전에 물을 건너는 것이다.

계속 둑을 따라가다가 둑이 왼쪽으로 꺾이는 부근에서 옛지형의 원형인 듯한 곳을 만난다.
여기서 내려서서 보면 양쪽의 논두렁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토리순지회관에 이르고 능선은 길 오른쪽으로 따라와 태화식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관에서 2차선 도로로 나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공장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 공장건물 뒤에서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끝-

여기서 잠시 회원들 중지를 모으기로했다.
1.현행대로 진행하여 토함산목장에서 끝을낸다.

2. 여기서 7번국도가 지나는 괘릉리 원고개까지는 3.57km거리에 높이는 200m가 안되는 구릉지로 대략 1시간정도가 소요될듯싶은데 생략하고
원고개에서 감산사입구까지도 괘릉리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므로 어느곳이 마루금인지 분간할 수 없고 안다해도
남의집 담장을 넘고 논밭을 가로질러이어갈순 없으므로 어차피 마을 도로를 따라 올라가야하니 별 의미가 없으니 차로 이동하고
감산사입구에서 산길로 들어 토함산목장까지가선 차로 석굴암 주차장까지가서 산행을 이어가서토함산을 넘어 추령까지간다.

그러면 전체적인 일정을 7구간에서 6구가늘 한구간을 줄일 수 있다.
결론은 2안으로 한시간정도 생략해서 하루일정을 앞당길수 있다니 바로 차로 감산사입구까지가면서 대신 영지를 차로 돌아볼 수 있었다.

영지 (影池).<요맥님 사진>

영지 (影池)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괘릉리에 있는 연못.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신라로 온 옛 백제지역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어린 곳이다.

아사달불국사 다보탑을 완성하고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사녀는
서라벌로 찾아갔으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주지의 뜻을 받아들여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못가에서 기다렸다. 남편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던 아사녀는 문득 못 속에서 탑의 환상을 보고
아사달을 그리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석가탑을 완성하고 아사녀가 기다리는 영지로 찾아 온 아사달 역시 아내의 죽음을 알고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릴 때 탑의 그림자가 이 연못에 비추었다 하여
그림자 못, 영지라 하였고 그림자를 비춘
다보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렀다.
연못가의 소나무숲에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영사(影寺)의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座象)이 남아 있다

괘릉 [掛陵]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철로가 지나는 원고개를 지나면서 바로 인근에 있는 괘릉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서운해서 자료로나마 둘러본다.

괘릉 (掛陵)전경으로 퍼온 그림이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外東邑)에 있는 798년경의 능으로 정식능호는 아니고 별칭이며 신라 38대왕인 원성왕의 능이라 추정하고있으며
괘릉 [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을 팔때 구덩이에 물이고여 널을 걸고(掛),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이라 불리게 됐단다.
괘릉은 현존하는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무덤이며,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제도를 대표하는 릉으로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풍수지리설이 바야흐로 그때부터 능묘 입지의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우리 나라 풍수 분묘의 기원이 되고 있는 곳입니다.

무인석(武人石) <퍼온그림>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으로 평가되는 괘릉은 능 입구에 세워진 석상(石像)으로도 유명하다.
봉분에서 남쪽으로 약 80m 정도 떨어져서 길 양쪽에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각기 1쌍씩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배치했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극히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특히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케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생김새가 위그루족이라는 말도있고 뒤에찬 주머니는 우리의 복주머니라기보다는 주판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한다.

문인석(文人石)<퍼온그림>
소매끝에 칼을가지고 있고 턱수염과 뒤에 갑옷을입고있어문인이 아니고 무인이란 말도 나온다.

돌사자 <퍼온그림>
나무랄데없이 섬세하고 듬직하게 사실을 묘사했고 암수도 구붑됐다.
그땐 이땅에 호랑이만 있고 사자는 없었단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外東邑)에 있는 798년경의 능으로 정식능호는 아니고 별칭이며 신라 38대왕인 원성왕의 능이라 추정하고있으며
괘릉 [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을 팔때 구덩이에 물이고여 널을 걸고(掛),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괘릉이라 불리게 됐단다.
괘릉은 현존하는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무덤이며,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제도를 대표하는 릉으로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풍수지리설이 바야흐로 그때부터 능묘 입지의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우리 나라 풍수 분묘의 기원이 되고 있는 곳입니다.

조선후기부터 수장한 임금이라면 문무왕릉이라고 하여 이곳에 문무왕릉이라고 표지석을 세웠으나
1967년에 대왕암이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1973년에 원성왕릉으로 수정되었단다.

원성왕에 대해선 다음과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삼국유사는 적고있다.
이찬 김주원이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 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김주원의 밑에 있었다.
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두건을벗고 흰 삿갓을 쓰고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나 점쟁이를 시켜 해몽을 하게하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쫒겨날 조짐이요,가야금을 잡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여 경신은 이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경신을 찾아온 아찬 餘三에게 꿈 얘기를 하였더니 여삼은 절을하고 말하기를"두건을 벗은 것은 자기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며,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궁궐에 들어갈 조짐이외다"하였다.
경신이 이말을 듣고 "내 윗자리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까?하니
아찬이 말하길 "몰래 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하여 경신은 그대로 북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세월이 흘러 선덕왕이 죽은후 신하들은 원래 선덕왕의 조카뻘인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당시 김주원은 도성에서 좀 떨어진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을 건너올수 없었다.
그사이에 경신의 측근들이 임금이란 하늘이 내리는 것인데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것을 보니
하늘이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원치않는 모양이라며 경신을 추대하여 조정분위기를 장악하여 왕이 되었다.

이렇게 원성왕은 왕이될 때도 그렇고 죽어서도 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괘릉에 묻혔다.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石床)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의 판석(板石)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甲石)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시키는 탱석(撑石)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비교적 얕게 부조한 12지신상은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오상(午像)만이 정면(남쪽)을 보고 있다.

또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측면에서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배치를 취했다.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으로 평가되는 괘릉은 능 입구에 세워진 석상(石像)으로도 유명하다.
봉분에서 남쪽으로 약 80m 정도 떨어져서 길 양쪽에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각기 1쌍씩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배치했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극히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특히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케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성왕의 능은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문에 따르면 원래 신라 귀족 김원량(金元良)이 자신의 별장을 희사하여 곡사라는 절을 만들었으나
원성왕이 죽으면서 장지(葬地)로 선정되어 절을 옮겼고, 경문왕 때는 능역(陵域)의 수호에 각별한 정성을 들였으며,
헌강왕 때에 와서 옮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괘릉 부근에는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


원성왕 [元聖王, ?~798]은?
본명 김경신(金敬信).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 淑貞夫人)이다.
780년(
혜공왕 16) 이찬(伊飡) 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하자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당시 상대등직에 있던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대신들은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金周元)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이 홍수로 인해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고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곧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유교정치를 지향한 원성왕은 788년(재위4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독서삼품과는 국학(國學)학생을 대상으로 치뤄졌던 일종의 졸업시험으로 유교경전의 해석능력에 따라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었으며
이 성적은 곧 관리임용으로 연결되었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묻혔다.

14 : 40.감산사(甘山寺)입구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철로가지나는 괘릉리 원고개는 신라 38대왕인 원성왕릉이라 추정되는괘릉이 있어 생긴 마을이름이다.
충효마을 괘릉동표석과 전주기사식당.사찰등이 있는 마을 소로길을 따라 들어간다.큰차는갈 수 없으니 소형차는 이럴때 좋다.
마을안길을 가다 청심사슴목장안내판 있는곳에서 우측으로 왔으면 바로 지도상의 사리밭등으로해서 감산사입구로 오는 것을
좌측길로 드는 바람에 괘릉저수지밑의 하천길을 따라 감산사로 돌아올리왔다.
감산사는 영진 지도엔 괘릉저수지 좌측에 표기되어있는데 우측에 있고 저수지로 올라가는길이 절뒤로 나있다.
절입구의 삼거리엔 이정표가있고 여기서부터 317m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오고 길도 좋다.

감산사(甘山寺)와 괘릉저수지.<요맥님 사진>
마을안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갔어야하는데 좌측 청심목장쪽으로 갔더니 길은 목장지에서 끝이났다.
사진 우측의 전봇대 선곳이 제대로 올라가는 도로다.

영진지도는 감산사가 저수지 좌측에 있으나 우측밑에 있는것이맞다..

감산사(甘山寺).<요맥님 사진>
감산사는 신라의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부모의 명복과 성덕왕(聖德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1915년경에 이 절터에서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국보 81)과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국보 82)이 발굴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3층석탑 1기와 연꽃무늬가 돌려 있는 석등(石燈) 대석(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감산사(甘山寺).<요맥님 사진>

감산사(甘山寺)전경.

감산사(甘山寺)입구 삼거리.
소형차는 진입이 가능하고 이 세멘트길은 저수지까지 들어가는 모양이다.
바로옆에 표지기들이 걸려있고 여기서부터 산길이 열린다.감산사까진 3분거리다.

감산사(甘山寺)앞에서 본 괘릉마을.
앞에 보이는 솔밭쯤이 지도상의 사리밭등쯤 되겠다.

감산사지 [甘山寺址]

경북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新溪里)에 있던 신라 때의 절터.

감산사는 신라의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부모의 명복과
성덕왕(聖德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1915년경에 이 절터에서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국보 81)과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국보 82)이 발굴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3층석탑 1기와 연꽃무늬가 돌려 있는 석등(石燈) 대석(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퍼온 그림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었다.
720년(
성덕왕 19)에 조성된 화강석제 불상으로 불신광배·대좌를 1장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불신을 제외하고는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82)과 거의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불상의 높이 1.83m

광배의 등 쪽에는 장문의 기록이 새겨져 있어 불상을 만든 유래와 연대를 명시하여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불상은 개원(開元) 7년, 즉 성덕왕 19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15년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감산사 절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국보 제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퍼온그림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었다.
720년(
성덕왕 19)에 조성된 화강석제 불상으로 8각의 대좌(臺座)와 거신광배(擧身光背:전신을 둘러싼 광배)는 1장의 돌로 만들었고,
부처는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다. 불상의 높이는 1.74m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는 큼직하며 얼굴은 근엄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쳤으며,
상체에서 반원을 그리다가 하체에 이르러 두 다리에 각각 타원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이것은 곧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옷주름의 양식인 동심(同心) 타원형 의(衣)무늬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법의의 왼쪽과 아래 끝에 옷주름을 잡아 낡은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나,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려 설법인(說法印:부처 손의 한 형식)을 나타냈다.

대좌는 각면에 안상(眼象) 1좌씩을 새겼고, 그 위에 겹꽃잎의 연꽃을 크게 조각하였다.
온몸을 싼 광배는 2가닥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둘레는
화염무늬로 처리하였다.
1915년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의 감산사 절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5호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퍼온 그림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되었다.
3층석탑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인 719년(
성덕왕 18) 중아찬 김지성(
金志誠)이 창건한 감산사(甘山寺) 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 다시 세웠다.

2층 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기단은 4매석으로, 상대갑석은 2매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에는 우주(
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옥개석에는 4단 받침을 각조하였다.
2·3층 탑신과 상륜부(
相輪部
)가 분실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나타낸다.



15 : 30.삼태지맥 분기점.
소나무숲길을 한동안 올라가면 317m봉이고 여기서부터 삼태지맥분기봉까진 시종 좁은 날등이 이어지고
좌측으론 괘릉저수지 끝부분이 잠깐 보이고 토암산으로 가는 긴능선과멀리 토함산도 보인다.
우측으론 외동과 마석산이 멀리 보이긴 하지만 날씨가 시원찮아 흐릿하다.
동남으로 쭉 올라오던 능선이 좌측으로 틀어지며 묘지가 나오고 우측 건너편에 통신탑과 삼태지맥산줄기가 보이더니 바로 도로에 내려선다.

15 : 35/42.토함산목장과 945번도로.
세멘트도로에 내려서니 갑자기 좌측앞쪽이 시원하게 트이고 고원분지의 넓은 초지가 나오고 저앞에 토함산목장의 축사가 보이며
세멘트 도로따라 좌측으로 몇분 내려오면 토함산 솔밭가든이 있고 바로앞에 불국사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945번 2차선도로가 나오고
도로건너는 토함산목장의 축사들이 보이고 토함산 자연휴양림 1.5km이정표가 보인다.

317m봉근처에서 본 토함산과 괘릉저수지 끝자락.<요맥님 사진>

삼태지맥 갈림봉 아래에서 본 토함산목장과 감포가는 도로.<요맥님 사진>

토함산목장앞 삼거리에서 뒤 돌아 본 삼태지맥 갈림봉과 솔밭가든.<카메라가 다시 작동됐다.>

토함산목장.우측은 감포,좌측은 불국사,석굴암으로 가는길이다.


15 : 54. 석굴암입구.매표소 좌측 이정표에서 산길로 듬.
대기하고 있던 차로 바로 토함산으로 가는데 몇분 나가면 삼거리인데 좌측은 불국사로 가는길이고
직진하여 능선따라 나있는 도로를 따라 몇분 더 올라가면 석굴암 주차장입구다.
입구에서 차는 추령으로 가서 대기하고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서면 주차장이고 저앞에 종루와 석굴암입구가 나온다.
석굴암입구에서 좌측으로 토함산가는 넓은길을 따라 바쁜걸음으로 10여분 올라가면 첫봉이고 첫봉위엔 성화채화지가 있다.

불국사 석굴암갈림길.
지맥능선위로 석굴암까지 차길이 이어진다.

석굴암 주차장.

석굴암 입구.
앞에 보이는 매표소 건물 좌측으로 토함산가는 큰길이 잘 나있다.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 안내문.

첫봉에있는 성화 채화지.

성화 채화지에서 본 토함산정상모습.


16 : 13. 추령갈림길.(추령 2.7km.토함산 0.3k. 석굴암 주차장 1.1km)
성화채화지에서 토함산정상을 건너다보고 내려서면 우측으로 추령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토함산정상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하니 이곳을 눈여겨 봐야한다.

추령갈림길.(추령 2.7km.토함산 0.3k. 석굴암 주차장 1.1km)
토함산정상엘 다녀와선 여기서 우측으로 큰길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



16 : 17/22. 토함산(吐含山.746m).정상표석2개와 조망도와 삼각점(불국사 24).길주의.
조금 올라서면 좌측위에 억새밭 헬기장이 있고 우측으로 급하게 떨러지는 능선이 호미지맥 마루금 같지만 경사가 급하고 족적이 없다.
정상에선 조망이 트여 추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추령으로 오르는 실날같은 도로가 보이고
추령위에있는 초록색 송전탑도 어렴풋이 보이고 추령건너로 멀리 함월산등 토함산 동북쪽의 산들이 다가온다.


여기서 자칫하면 직진하는 능선길을 따라가면 추령 서쪽의 황룡동으로 빠지기 쉽고 되 내려오다
헬기장 동쪽능선을 따라 정확한마루금을 타보겠다고 내려와도 동북으로 내려서다 동쪽으로 꺽이는지점을 정확하게 알수없고
길이 동북능선을 따라서 추령 서쪽의 가내동으로 내려가지 추령가는 주능선쪽으로 건너오는길이 희미하니
이정표가있는 추령갈림길까지 내려와서 큰길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
갈림길서 토함산이 0.3km인데 200여 m단축해 볼려다가 지칫하면 큰 낭패를 당할수도있다.

토함산정상모습.

토함산정상에서.
좌측부터 정송자님.김완수님.최덕조님.심용보님.나.홍완섭님.현주환님.

토함산정상에서 요맥 강형태님.

토함산정상에서 본 추령.
좌측 추령고개위의 녹색 통신탑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보이는 우측능선이 지맥마루금인데 보기보단 경사가 심하다.
정확한마루금을 타보겠다고 이능선으로 내려와도 동북으로 내려서다 동쪽으로 꺽이는지점을 정확하게 알수없고
길이 동북능선을 따라서 추령 서쪽의 가내동으로 내려가지 추령가는 주능선쪽으로 건너오는길이 희미하니
이정표가있는 추령갈림길까지 내려와서 큰길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
갈림길서 토함산이 0.3km인데 200여 m단축해 볼려다가 지칫하면 큰 낭패를 당할수도있다.

토함산정상에서 본 추령에서 함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16 : 31. 포수우물 180m.추령 2.6km 이정표.주능선만남.비탈길을 내려감.
산허리길로 돌아오면 토함산 0.5km.추령2.5km 이정표가 있고 100여m를 더가면 추령2.6km.포수우물 180m 이정표가 있는데
토함산에서 원 마루금을 타고오면 이리로 내려와야하는데 두곳다 내려오는길이 안보이고 있다해도 경사가져서 돌아오는길만 못하다.
만약에 토함산에서 잘못내려가서 포수우물 이정표를 만났다면 포수우물로 가서 이길로 올라와야 할 것이다.
포수우물 180m이정표에서 포수우물은 좌측넘어로 가고 추령길은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간다.

포수우물 180m.추령 2.6km 이정표.
산허리길로 돌아오면 토함산 0.5km.추령2.5km 이정표가 있고 100여m를 더가면 추령2.6km.포수우물 180m 이정표가 있는데
토함산에서 원 마루금을 타고오면 이리로 내려와야하는데 두곳다 내려오는길이 안보이고 있다해도 경사가져서 돌아오는길만 못하다.
만약에 토함산에서 잘못내려가서 포수우물 이정표를 만났다면 포수우물로 가서 이길로 올라와야 할 것이다.
포수우물 180m이정표에서 포수우물은 좌측넘어로 가고 추령길은 우측으로 급하게 내려간다.


16 : 35. 앞 봉에서 전망트임.
토함산내림길과 건너온길을 뒤돌아보고 추령까지 갈길을 살펴보고 추령고개위의 록색 통신탑을 눈여겨봐야한다.
내려온 안부에선 좌우로 하산길 있고올라선 앞봉엔 이정표(추령 1.5km.토함산 1.5km)있고 좌측으로 내려갔 오름길로 들며
좌측 사면으로 건너가는길이 있고 우리가 길길이 그쪽인데로프로 막아놨다.

앞 봉에서 뒤 돌아 본 토함산 내림길의 지맥마루금.
사진의 우측능선으로 길이 잘나있어 십중팔구 그쪽으로 가게되고
마루금엔 족적이 희미하다.

앞 봉에서 본 가야할 추령가는길.
사진의 우측 가운데서 좌측으로 내려가야하고 멀리 추령고개의 통신탑이 보인다.


16 : 57. 다음봉에서 길주의.
올라서면 우측능선이 산세도 실하고 길도 좋다.신경쓰지 않으면 이능선길을 따르기 십상이다.
이 우측능선은 상범마을 북쪽능선으로 460,70m봉을 여러개넘어 장항리까지 이어진다.
우리기 갈길은 좌측으로 내려서야하는데 정점에서 몇m떨어져 밑에 길이있어 정점에선 잘 안보인다.
이곳만 내려오면 다음부턴 길이 헷갈릴곳은없고 작은봉 두어개를 넘으면 초록색의 LG통신탑이나오고
이 통신탑우측으로있는 로프줄을 따라 5분쯤 내려오면 오늘의 종착지인 추령고개다.

갈림봉.주의할곳.
추령 1.5km.토함산 1.5km가 써 있는 어정표있는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섰다 올라선봉이다.
우측능선이 실하고 길도 그쪽이 좋고 좌측 내림길이 정점아래쪽에있어 잘 안보인다.


17 : 23/27. 추령(310m).
발밑으로는 4번국도 추령터널이 지나가고 터널이 생기면서 한가로워진 고개위엔 백년찻집이란 고급차집이 있다.

추령(310m)고개위의 백년찻집.
저위 통신탑에선 우측에 로프가 쳐져있는곳으로 내려온다.

추령(310m)고개.
발밑으로는 4번국도 추령터널이 지나가고 터널이 생기면서 고개윗길은 한가로워졌다.

◈ 돌아오는길.
바로 추령고개를 내려오며 토함산에서 잘못 내려온 일행들을 태우고 경주시내로 이동하여 저녁식사를하고
18 :30분 경주를 출발하여 천안에 돌아오니 21 :44분.
오늘은 지맥길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차로 이동한 거리가 많아서 아쉽지만효율성을 높이기위한 조치였다 자위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