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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ㅎ 기맥,지맥.

호미지맥 4구간[추령-함월산-성황재-만리성-갈평리(14번도로)].

호미지맥 4구간[추령(4번국도)-함월산-성황재-만리성-갈평리(14번도로)].

 


482m 헬기장에서 뒤 돌아 본 호미지맥모습.
누르면 정지 화면이 뜹니다.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도상거리 20km +2.5km(하산). 7시간 12분.

추령(14번국도.310m)-0.5km(15분)-393m 삼각점-1.8km(31분)-497m헬기장-1.5km(26분)494.2m(헬기장과 삼각점 묘)-
0.9km(16분)안부사거리-1.2km(30분)-함월산(584m.표찰)-1.3km(23분)-560m봉넘어 습지갈림길-1.3km(23분)-594.1m삼각점-0.8km(13분)-
기림사계곡갈림길-1.8km(31분)-482m헬기장-1.7km(25분)-성황재(14번도로.휴게소)-1.2km(21분)-390m갈림봉-0.9km(11분)-성황당-1km(23분)-
송전탑봉-1.3km(20분)-시계능선꼭지점(행군로시작)-1.3km(20분)-만리성(427m)-1.4km(26분)-갈평리 갈림길-2.5km(29분)-갈평피정의집(14번도로).

◈ 일시 : 2009. 2. 15(일).

◈ 인원 : 요맥회원 10명(요맥 강형태 대장님. 양천 심용보님. 대맥 최평칠님.김한수님.권순창 교수님.정송자님.산바람 최덕조님.홍완섭님 .현주환님. 그리고 나)

◈ 날씨 : 바람이 불고 한땐 진눈개비도 날리며 음산하고 추운날임.

◈ 지도 : 1 /25000. 불국.용덕1/50000. 불국사. 영진5만 : p417 경주.393 포항.

 

호미지맥 4구간[추령(4번국도)-함월산-성황재-만리성-갈평리(14번도로)]지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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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지맥 4구간[추령(4번국도)-함월산-성황재-만리성-갈평리(14번도로)]지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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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정리.(11 : 02~18 : 14. 7시간 12분).

06 : 40. 사당동출발.
07 : 35. 천안통과.


10 : 55/11:02. 추령(秋嶺.310m)4번국도.백년찻집.발밑은 추령터널
11 : 17/9. 393m 삼각점.준희님표찰(398.4m).좌측아래로 모차골이 내려다보임.
11 : 50. 497m봉 억새,싸리나무 헬기장.오름길이 가파름.좌측에 모차골하산길.
12 : 00. 507m봉.우측으로 골굴사로가는 능선분기하고 넘어가면 펑퍼짐한분지에서서쪽으로 꺽어져 494.2m봉오름.
12 : 16/8. 갈림길서 좌측 40m거리에 494.2m삼각점과 묘지있고 토함산조망.
12 : 27. 지도상의 459.2m엔 묘지있고 함월산과 494.2봉이 조망됨.


12 : 34. 사거리 안부.우측 세수방,좌측 모차골가는 하산길이 좋음.
12 : 46. 530m봉.오름길이 가파르고 앞에 550봉과 함월산이 조망됨.
12 : 52/55. 550m봉.전망바위에서 좌측 절골과 포항시계능선과 뒤로 토함산이 보임.
13 : 04/13. 함월산(含月山.584m).함월산 표찰있고 좌측으로 내려감.


13 : 26/39. 550봉은 우측으로 건너가고 560m봉 아래에서 점심.진눈개비가 내림.
13 : 49. 560m봉을 내려간 갈림길.좌측에 습지가는길이 있고 좌측 611m봉이 주능선같이 보이나직진하여 510m봉넘어로 삥 돌아감.
14 : 07. 좌측 611m봉에서 온길과 합류하는 시경계능선위.좀더 올라가면 591.4m봉 정점임.
14 : 12/14. 591.4m 삼각점(불국사 455). 정점 바로전에 좌측 건너로 오리온목장과 운제산줄기가 조망됨.


14 : 22. 사태지역우측갓으로 지나감.맥이 거의 잘려나감.
14 : 27. 안부에서 우측계곡으로 기림사쪽으로 가는 좋은길 있음.
14 : 41. 좌측 430m봉 능선갈라지고 우측으로 꺽어지면 482봉과 성황재가 보임.
14 : 55/56.가파르게 올라선 헬기장.함월산부터 온길이 다 조망됨.
14 : 58. 482m정상 헬기장.토함산부터 온길이 다 보이고 성황재와 만리성이 조망됨.
15 : 23. 성황재.14번도로.좌측아래에 휴게소 있음.우측은 경주 양북면.좌측은 포항 오천읍.절개지를 직등하여오름.


15 : 44. 약 390m.예각으로 꺽어 좌측으로 내려감.양쪽 큰 산줄기 사이의 얕은 줄기임.온길과 갈길이 조망됨.
15 : 55. 성황당고개.좌우계곡으로 내려가는 옛길이 있음.우측은 권이리 수정사,세바시,좌측은 진전교.
16 : 17. 송전탑봉.403봉 오름길이 대단이 가파르고403봉다음봉에 송전탑있음.
16 : 23. 좌측으로 90도 꺽어내려감.바로 사태지역나옴.
16 : 37/42.시경계능선 꼭지점.바로밑에 작은 암자있고 낡은 행군로 안내판있고 길은 대로가 됨.


17 : 02/04. 만리성(427m).표석과 삼각점(불국사 307)과 묘(가선대부 도은김씨)있고 갈길조망.내려서며 바로 좌측길조심.
17 : 30/5. 갈평리 갈림길.갈림길 우측에 큰 묘지있고 묘지윗봉에서 갈평리쪽과 묘봉산이 조망됨.


17 : 59. 사당건물인듯한 집이있는 계곡의 큰길을 만남.
18 : 08. 14번 도로의 갈평리 갈평2교.좌측에 갈평정수장과 갈평피정의집이 있음.
18 : 14. 갈평 피정의집.

18 : 30. 갈평 피정의집출발
19 : 20. 오천읍에서 해장국으로 저녁먹고 출발.
22 : 40. 천안도착.

◈ 산행후기.

새벽부터 하늘이 시커멓고 간간이 진눈깨비가 내린다.오후엔 날이들고 바림이불며 날이추워질거라는 일기예보다(다음날부터 날이추워져 영하10도로 내렸다).
눈이면 그래도 다행인데 비가오면 걱정은 배가된다.오늘거리가 만만찮은20km이고 하산할려고하는 천용사쪽으로 길이 있는지없는지 알수없다.
날이 저물어서 내려가다 길이라도 없으면 고생할텐데 날씨까지 꾸물거리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중간에 한번 커피먹고 경주 IC를 나와 우측에 남산을 보며 북천을 따라 오르다 보문단지앞에서 우회전하여 보문호를끼고 올라
불국사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덕동호를 돌아 올라가 추령터널앞에서 우측 옛길로 오르면 백년찻집이 있는 추령인데 좀 늦어 11시가 다돼서 도착했다.
국립공원지역이라 혹시 입산금지구역인지도 몰라 서둘러 사진 한 장 찍고 절개지 서쪽 청사초롱등뒤로 얼른 들어선다.

10 : 55/11 : 02.추령(秋嶺.310m)4번국도.백년찻집앞.
발밑으로 추령터널이 지나서 고개위는 한적하고 찻집에서 은은하게 음악이 흘러나온다.

10 : 55/11 : 02.추령(秋嶺.310m)4번국도.백년찻집앞에서.
좌로부터 강형태 대장님. 정송자님. 최덕조님. 심용보님. 현주환님. 최평칠님. 권순창님. 김완수님. 나. 홍완섭님.

10 : 55/11 : 02.추령(秋嶺.310m)4번국도.백년찻집.발밑은 추령터널
11 : 17/9. 393m 삼각점.준희님표찰(398.4m).좌측아래로 모차골이 내려다보임.
11 : 50. 497m봉 억새,싸리나무 헬기장.오름길이 가파름.좌측에 모차골하산길.
12 : 00. 507m봉.우측으로 골굴사로가는 능선분기하고 넘어가면 펑퍼짐한분지에서서쪽으로 꺽어져 494.2m봉오름.
12 : 16/8. 갈림길서 좌측 40m거리에 494.2m삼각점과 묘지있고 토함산조망.
12 : 27. 지도상의 459.2m엔 묘지있고 함월산과 494.2봉이 조망됨.


12 : 34. 사거리 안부.우측 세수방,좌측 모차골가는 하산길이 좋음.
12 : 46. 530m봉.오름길이 가파르고 앞에 550봉과 함월산이 조망됨.
12 : 52/55. 550m봉.전망바위에서 좌측 절골과 포항시계능선과 뒤로 토함산이 보임.
13 : 04/13. 함월산(含月山.584m).함월산 표찰있고 좌측으로 내려감.

토함산전모를 건너다보고 생각못한곳에 393m삼각점이 박혀있는데 글자판은 없고 아래로 모차골 계곡이 내려다 보인다.
별 굴곡이 없는 능선길을 가다 된비얄을 올라서며 좌측으로 갈림길을 보내고 좀더 오르니 497봉 헬기장인데
전망은 없고 억새와 싸리나무만 있고 우측으로 골굴사로 가는 능선을 보며 건너편 507봉에 올라서니 여기도 억새와 싸리나무만있는 헬기장이다.

507봉을 넘어가 앞에 뾰족봉을 오르지 않고 고원분지같이 평평한 곳에서 좌측으로 90도꺽어 분지를 건너가선 급오름을 잠깐 올라서면
494.2m봉인데 정점은 주능선에서 좌측으로 40여m 떨어져있어 생각없이 가다보면 지나치기쉽겠다.


494.2봉엔 묘지가 있고 삼각점뒤로 토함산이 멀리 보이고 방금 지나온 507,497봉이 건너다보이며 조금 내려서면 함월산이 윤곽을 드러낸다.

양쪽으로 하산길이 있을듯싶은 안부를 건너 영진지도에 459.2m으로 표기된봉엔 묘지가 있고
넘어가면 좌우로 넘는 뚜렷한 하산길이 있다. 좌측은 모차골,우측은 세수방,원동리로 내려가는 계곡길이다.

빳빳하게 곧추서 올려채면 530봉인데 우측건너로 함월산이 가깝게 보이고 다시 앞봉인 550봉을 넘어서면 좌측에 전망바위가있어
가야할 지맥길의 591.4봉과 시경계봉인인 611봉과 그좌측으로 봉대산줄기를 건너다보고 내려온 안부에선 함월산으로 오르지 않고
좌측으로 건너가는 허리길이 있고 직진하여 오르면 584봉인 함월산이다.
함월산정상엔 함월산 570m표찰이 나무에 걸려있고 정상은 참나무잡목에 전망도 없고 초라하다.
좀나가보면 뭐가 있을까 싶어 좀더 나가봐도 하산길만 있을뿐 별다른게 없어 다시 돌아온다.
옛날 신라때는 화랑들이 함월산에서 무예를닦고 훈련을 했다하며 지금은 이산밑에있는 골굴사엔 불교무술인 세계선무도협회총본원이 있다.

0 : 55/11 : 02.추령(秋嶺.310m)4번국도.백년찻집앞.
절개지 서쪽(경주쪽)이 들머리.청사초롱엔 멋있는 말들이 써있고 지금보니 입산금지표지판이 있다.

절개지위에서 본 추령과 백년찻집.뒤로 토함산이 보인다.

땡겨 본 토함산.

토함산 가는길.

393m봉에 보는 모차골과 삼각점.
국립지리원 표기대로 393m로 표기한다.바로앞봉이 더 높고 봉우리다운 봉우리가 아니라서 삼각점을 못보고지나치기쉽다.

497m봉.
오름길이 가파르고 정점 바로전에 좌측으로 모차골가는 하산길이 있다.

497m봉에서 본 494.2m봉과 봉대산줄기.
497m봉과 507m봉사이에서
우측으로 골굴사로 가는 능선이 갈라진다.

507m봉.
넘어가면 펑퍼짐한 분지에서 앞봉을 오르지 않고 90도 좌측으로꺽어 494.2m봉을 오른다.

494.2m봉에서 본 토함산과 삼각점.
정점은 주능선에서 좌측으로 40여m 떨어져있다.
497m,507m봉이 건너다보이고 내려오면서 함월산이 그 형채를 내민다.

지도상의 459.2m봉에서 본 함월산.
우측봉이 함월산이고 좌측의 두봉우리를 넘어서 우측으로 꺽어져 오른다.

지도상의 459.2m봉에서 뒤 돌아 본 494.2m(우)봉과 507m봉(좌).

지도상의 459.2m봉 넘어 530m봉아래의 안부 사거리.
좌측은 모차골,우측은 세수방,원동리로 내려가는 계곡길이다.

530m봉에서 본 함월산(584m).

550m봉 전망바위에서 본 611m봉(가운데 제일높은봉.지맥에서 벗어나있음)과 591.4m삼각점봉(소나무가지뒤)

550m봉 전망바위에서 본 611m봉 좌측의 시경계능선.우측골짜기끝에 농장축사가 보인다.

550m봉 전망바위에서 본 함월산(584m)모습.저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

550m봉 전망바위에서 뒤 돌아 본 토함산(좌측바위뒤)과 507m봉,494.2m봉(우).

함월산(584m)정상에서 심용보님과.
정상은 볼품없고 오름길전에 좌측으로 건너가는길이 있고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기림사와 골굴사가 이 함월산품안에있어 옛날 신라시대에도 화랑들이 이 함월산에서 수련을 하였다하고
그맥은 지금도 이어져서 불교전통무술인 세계선무도협회총본원이 골굴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산행을 멈추고 함월산밑에 있는 골굴사(骨窟寺)와 선무도(禪武道), 선무도(禪武道)의모체인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를 짚어보고
사라져간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을 다시찾아 집대성시킨 청호당 양익대선사 (靑昊堂 兩翼大禪師 ) 님의 열반이야기를 들춰보자.
오늘 며칠전에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장례식을 TV로 보면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루고 좌탈입망 [坐脫立亡]하신 양익대선사( 兩翼大禪師 )님을 그리워본다.

골굴사 [骨窟寺. 세계선무도협회 총본원]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약 20km 떨어진 경주시 양북면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 사원으로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약반전산에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골굴사(骨窟寺,)와 기림사(祈林寺)를 창건한 광유성인(光有聖人)은 오늘날의 미얀마 지역(옛인도)의 전설 속에 전해지는 역대 조사중의 한분이다.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 만든 석굴사원 골굴사는 티벳의 돈황이나 인도 아잔타, 엘로라 석굴사원의 축소판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

함월산 석회암 절벽에는 석굴로 여겨지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는데, 맨 꼭대기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로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세련되지 못한 옷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법당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탓에 앞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 정도가 심해 비닐하우스 같은 투명 보호막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법당굴을 비롯한 다른 굴은 그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근엄한 노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을 모셔 놓았다.

골굴사 [骨窟寺. 세계선무도협회 총본원] 2005.11.에 찍은 그림이다.
석굴 사원으로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약반전산에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골굴사 [骨窟寺].
7년간 양익 스님에게 사사 받은 적운 스님은 1985년 불교금강영관을 ‘참선과 무도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선무도’로 칭하며 대중화에 나섰다.
이후 선무도 총본산인 경주 골굴사를 중심으로 서울, 안산, 부산, 양산 등 국내 8개 지원과 미국 플로리다 지원,
캐나다 토론토 지원, 호주 살즈버그 지원, 프랑스 토루스 지원 등 해외 4개 지원에서 선무도를 보급, 홍보하고 있다.

골굴사 (骨窟寺) 마애여래 좌상. 보물 581호.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로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세련되지 못한 옷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골굴사 (骨窟寺) 마애여래 좌상. 보물 581호.
법당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탓에 앞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 정도가 심해 비닐하우스 같은 투명 보호막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법당굴을 비롯한 다른 굴은 그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근엄한 노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을 모셔 놓았다.

골굴사 (骨窟寺) 관음굴.

골굴사 (骨窟寺)
골굴사(骨窟寺,)와 기림사(祈林寺)를 창건한 광유성인(光有聖人)은 오늘날의 미얀마 지역(옛인도)의 전설 속에 전해지는 역대 조사중의 한분이다.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 만든 석굴사원 골굴사는 티벳의 돈황이나 인도 아잔타, 엘로라 석굴사원의 축소판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

골굴사 (骨窟寺) 마애여래 좌상. 보물 581호.안내판.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선무도(禪武道)
양익 스님이 체계를 잡은 불교무도는 정확히 ‘불교금강영관’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선무도, 금강승불무도, 선관무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모두 대중화를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불교금강영관’은 부처님으로부터 2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인 수행법으로
몸과 마음과 호홉의 조화로 작게는 심신의 평화로운 안정과 크게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적 수행법이다.

신라의 원광법사나 원효대사는 신라화랑들의 신심수련과 호국 무술로 세속에 전파했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호국무술로 정착돼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금강승들을 중심으로 비전돼 왔다.
조선시대 승병을 이끌었던 스님들도 불교무도의 명인들이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강점기를 맞으며
맥이 끊긴 것을 1970년대 양익 스님이 많은 부분을 발굴, 복원, 체계화시킨 것이다.

수련법은 정적 수련을 위주로 하는 영정관법(靈靜觀法), 선체조, 선요가에 해당되는 영중관법(靈中觀法), 동적인 수련에 해당되는 영동관법(靈動觀法)으로 나눠진다.
다시 세부적으로 입관(立觀), 좌관(坐觀), 행관(行觀)으로 영정입관과 영동입관, 영정좌관과 영동좌관, 영정행관과 영동행관으로 나뉘는 것이다.

모든 수련에서 몸과 마음, 호흡의 일치를 중요시 하며 선체조와 팔, 다리, 머리, 배, 등판 등의 다섯 부위를 부드럽게 한다고 하여
오체유법이라 통하는 선요가 등의 기본 수련이 바탕이 돼야 영정관법이나 영동관법을 수련할 수 있다.

특히 영정행관은 10개의 동작으로 이뤄져 영동행관의 승형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행(行), 주(住), 좌(座 ), 와(臥), 어(語), 묵(默), 동(動), 정(靜), 반(返), 공(空)의
10개 동작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몸 전체에 안정과 활력을 주는 동작이다.

또 영동행관은 일반무예의 형, 즉 품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1승형에서 10승형까지 있다.
다른 무술의 경우, 초단의 수련 경력을 가진 사람이 6단의 품세를 흉내 낼 수 있는 것과 달리
1승형을 수련한 사람이라도 2승형이나 3승형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만큼 호흡을 통한 내공이 연마돼야 하는 수련법인 셈이다. 이어 10승형 다음 단계로 1지에서 10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수련내용을 좌관, 입관, 행관의 밀교적 관법수행에 비추어 보면 불교금강영관의 동작이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무도의 수련내용 중 앉아서 하는 좌관법만 보더라도 가부좌를 취하고 깊은 호흡의 조화와 더불어 여러 형태의 수인을 연결해 움직여
심리적인 상태를 조작함으로써 삼매에 들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금강영관은 철저하게 수행적 실천법으로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원욱·적운·안도 스님 등 보급 앞장

불교금강영관의 대중화에는 서울 호압사의 원욱 스님과 적운 스님, 안도 스님이 앞장서고 있다.

원욱 스님(호압사 주지)은 선관무가 무술이 아닌 수행법임을 강조하며,
서울 방배동의 중앙총본원과 성남의 경기본원, 전주의 전북본원을 축으로 선관무 수행법을 보급하고 있다.
특히 선관무는 서울과 고양 등지의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도 보급돼 있으며,
이스라엘에도 분원이 마련돼 한국불교를 알리고 있다. 중국과 미국에도 선관무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다.

7년간 양익 스님에게 사사 받은 적운 스님은 1985년 불교금강영관을 ‘참선과 무도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선무도’로 칭하며 대중화에 나섰다.
이후 선무도 총본산인 경주 골굴사를 중심으로 서울, 안산, 부산, 양산 등 국내 8개 지원과 미국 플로리다 지원,
캐나다 토론토 지원, 호주 살즈버그 지원, 프랑스 토루스 지원 등 해외 4개 지원에서 선무도를 보급, 홍보하고 있다.

세계금강승불무도협회 총재인 안도 스님도 부산 금강선원을 중심으로 부산 시내, 양산, 기장 등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부산경상대학교 경찰행정과 무술 교수로 활동하며 저변확대에 나서고 있다.
범어사에서는 불무도 템플스테이를 열어 청소년, 일반인 등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단법인 세계선무도협회 정현표 회장은 “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로 심신의 안정과 깨달음을 향한 구도 수행법인 선무도는
정신건강이 화두가 된 웰빙시대에 적합하다”며 “불자뿐만 아니라 개신교, 가톨릭 신자 선무도 인구도 약 200여명에 달하고 있는 등
‘국민무예’로 발돋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호당 양익대선사 (靑昊堂 兩翼大禪師 )님은 누구인가?

생전의 청호당 양익대선사 (靑昊堂 兩翼大禪師 )님.


내가 양익 대선사님을 만난것은 출가한지 얼마안된 1965도다.
내고향인 안성 청룡사에 입시공부하러 들어갔을 때였는데
그때도 벌써 무술의 고수여서 가부좌를 한채로 그 큰절방에서 건너뛰셨다.
그후론 금정산 범어사청련암에 계시다는 소문만 들었지 한번도 만나뵙질못햇다.
그때 같이있던 스님중에 동산스님제자인 양익스님,인걸스님,웅당스님이렇게 세분이 있었는데
웅달스님은 그후 나하고몇 년을 같이살다 인도로 가신다고 가셨고
인걸스님은 소식을 몰라 한번 찾아볼까하면서도 40년이 훌쩍 지났는데
오늘 이 자료를 찾다보니 인걸스님은 양익스님 법제자로 불교금강영관 연수원 출신들 모임18명명단에 들어계신걸보니
이분야의 큰 스님이 되셨는걸 알 수 있다.웅달스님 소식도 들을겸 언제한번 찾아뵈야할것같다.

1934년 9월25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에서 아버지 김해 허수봉 어머니 밀양박씨에서 태어남.속명은 허남익.
1962년 (29세)출가하여 64년 비구계를 동산 스님께 받았다.
1971년 (38세)범어사 극락암에서 연수원 설립. 불교무도(불무도) 지도법 개발.
1978년 (45세)범어사 청련암에 금강영관 수련원 개설. 불교무도(불무도) 본격 지도
2006년 5월 6일 새벽 1시 20분경, 범어사 청련암에서 좌탈 원적 (세수 73세, 법랍 45세)

서울대법대 출신으로 사시 1차 합격한 뒤 2차시험을 준비하러 범어사절에 고시공부 하러 왔다가 출가한
양익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물론 무술인들에게도 ‘전설’같은 존재다.
이는 일생을 통해 ‘불교금강영관’이라는 수행법을 체계화하고 전수해온 스님의 삶이 수행자로서뿐 아니라 무도인으로도 대중의 지표가 돼 왔다는 방증이다.

1962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출가한 양익 스님은 <법화경>과 <화엄경>을 토대로 몸과 마음을
실천적으로 수행해 번뇌를 여의토록 하는 불교금강영관의 체계를 정립하고 출·재가 제자들에게 전수해 왔다.

‘금강영관’ ‘신심일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제자들에게 일렀던 양익 스님은 몸의 극한에서 정신적인 초월을 이끌어내는 수행법으로서 불교금강영관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양익 스님은 검술, 창술을 배제하고 공격이나 방어의 목적이 아닌 심신의 조화로운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법으로서 틀을 잡았다.

양익 스님은 갖가지 일화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범어사 들어가는 입구에 일주문이 있고, 이 일주문은 그 높이가 대략 4m 정도 된다.
양익 스님이 37세 때인 1971년에는 범어사 극락암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날 같이 공부하던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들이 양익 스님에게 시범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하니까,
일주문 지붕의 기왓장으로 훌쩍 뛰어올라서 한 발을 디딘 다음에 반대편 땅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던 것이다.
이 일화가 전국의 무술인들에게 널리 회자되면서 청련암은 한국의 소림사가 되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게 도전장을 냈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검도의 고수가 찾아와 겨루는데 검도의 고수는 목검을 쥐고, 자신은 청련암 뒤뜰에 있던 썩은 나뭇가지를 쥐었다.
검도 고수가 목검으로 썩은 나뭇가지를 후려치는 순간에 목검이 부러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육체적 힘보다는 내공(內功)의 축적에서 나오는 기(氣)가 중요하고, 이 기(氣)는 마음의 집중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은 양익 스님이 결과부좌한 채로 공중부양하여 천장의 못을 빼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익 스님은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히 싫어해 제자들이 일반에게 불교금강영관을 보급하는 것을 반대하다
나중에는 수행법으로서 내실 있게 가르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양익 스님을 은사로 12년간 선무도를 수련한 안도 스님은 “지난해 범어사 개산대재에서 금강승불무도를 선보였다는 이유로 몽둥이를 맞았다”며
“수행자답게 겸손하지 못하고 섣부른 잡기를 대중 앞에 선보인다는 게 몽둥이의 이유였는데
그때 매를 든 스승에게서 제자를 아끼는 자비심을 절실히 느꼈다”고 회고했다.


양익 스님은 죽기 이틀 전에도 강원도 홍천에서 진행되던 시방원(十方院) 불사(佛事) 현장에 다녀왔다고 한다.
내려오다가 법흥사에 들러 초파일 등(燈)을 달았다. 범어사에 와서는 제자들에게 나머지 불사를 당부하였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서류와 자료도 모두 넘겨주었다. 물론 이때까지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오후에 다시 통도사 보궁(寶宮)에 가서 등을 달고, 저녁에 범어사 청련암에 돌아왔다.
저녁에는 당신 거처에서 평소와 같이 조용히 참선을 하고 있었다. 상좌가 스님 방에 들어가서 초파일 뒤처리에 대한 질문을 했으나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대신 “흠-흠-흠” 하고 큰 기침 3번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니르바나(Nirvana·열반)에 들었다.

좌탈입망 [坐脫立亡]

청호당 양익대선사 (靑昊堂 兩翼大禪師 )님 좌탈입망 [坐脫立亡]하신모습.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좌측은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스님,우측은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의 좌탈입망 모습이시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제3조 승찬(僧璨)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당(唐)의 등은봉(鄧隱峰)은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曉峰) 외에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
백양사의 만암(曼庵),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九山),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 등이 모두 좌탈입망하였다.

‘좌탈입망’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다. 앉은 자세나 또는 선 자세로 입적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승(高僧)들 가운데 앉아서도 가지만, 때로는 선 자세로 죽는 경우도 있다. 선종(禪宗)의 삼조(三祖) 승찬대사는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고 열반하였다.
둘째는 좌탈입망(坐脫入忘)이다. 앉은 자세로 육신을 벗고 우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좌망(坐忘)’과 비슷하다.

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로 태어나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다시 환생할 때 각성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 되는 ‘웰 엔딩(Well End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당시 부산일보 기사다.

제자 안도스님이 본 불교무술 대가 범어사 양익스님
몸이 마음을 따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무술수행법 '불교금강영관' 열반계기 일반인 관심 끌어

불교 무술의 대가였던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이 지난 6일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죽음마저 마음대로 다루었다는 뜻이다. 스님의 열반을 계기로 무술 수행법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직계 제자 안도 스님에게서 불교금강영관과 양익 스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1971년 양익 스님이 높이 4m에 이르는 범어사 일주문을 뛰어넘었다는 얘기는 사실입니까?" 안도 스님은 "경공술(輕功術)이라는 게 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몸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음 먹은 대로 몸이 따라가는 경지가 있다"라며 "스승은 몸이 마음을 따라올 수 있는 수행의 경지,심신일여(心身一如)를 입버릇처럼 늘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같은 새끼줄이라도 도둑에게는 목 조르는 흉악한 줄이 될 수 있지만 선한 이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몸도,마음도 그 새끼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8~9년 전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길이 60㎝의 봉(棒)이 스님의 어깨와 팔의 윤곽을 따라 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라고 했다. 호흡으로 기를 모을 때 물체를 부릴 수 있다는 것. 이른바 내공이다. 검도 고수가 내려치는 목검을 썩은 나뭇가지로 맞받았는데 오히려 목검이 부러졌다는 양익 스님의 전설도 다 같은 얘기다.

안도 스님은 "관법(觀法)이 중요하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이다"고 했다. 관법에는 앉아서 몸의 호흡을 골고루 돌리는 좌관(坐觀),다리와 허리로 서서 몸의 균형을 이루며 호흡 위주로 마음의 움직임을 관하는 입관(入觀),극대로 움직이면서 삼매에 드는 행관(行觀)이 있다. 입관과 행관에서는 호랑이 용 사슴 원숭이 곰 거북 학 등 7가지 동물의 움직이는 모습도 빌려오는데 "그것은 자연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세를 빌려와 몸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안도 스님은 설명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자세는 모든 운동의 기본 자세인 기마 자세이다. 허리와 관절을 강화시킨다. 기마 자세로 서서 명호나 진언을 1천독,혹은 1만독하는 것도 하나의 수행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안도 스님은 "스님은 신구의(身口意),몸동작과 호흡,마음 3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 관법의 요체"라고 했다. "호흡으로는 억지로 하는 단전호흡보다 아주 자연스러운,마음이 맑아지면 저절로 이르는 태식호흡을 해야합니다."

그는 "무술이 출중해 공중부양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스승은 관법을 통해 영육을 넘나들었다는 것을 차츰 알게됐습니다. '구병시식'이라 하여 청련암에서 스님이 행했던 숱한 천도는 스님의 경계를 드러내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양익 스님의 맥을 이어받은 직계 제자들의 다수는,스님의 가풍을 따라 밖에 나서서 가르치는 걸 삼가하고 지금 토굴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안도 스님은 "열반 전날,스님은 서류들을 사제 약연에게 맡겼다. 또 통도사에 들러 부처님 사리를 친견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전혀 몰랐다"고 했다.

양익 스님은,불국사 문중으로 월산 스님의 상좌들인 경주의 허주 스님,진주의 종인 스님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무술승으로 꼽혔다. 양익 스님의 직계 상좌는 28명(
정경 스님을 비롯한 고봉, 의정, 정산, 대일, 법찬, 안도, 광원 스님 등)이며,양익 스님이 가르친 불교금강영관 연수원 출신들 모임(18명.원욱, 인걸, 지연, 적운, 원명, 각현 스님 등)이 있는데 모두 불교 무술의 고수들이다.

[출처] 양익|작성자 연경

다시 가던길을 가보자.

13 : 04/13. 함월산(含月山.584m).함월산 표찰있고 좌측으로 내려감.
13 : 26/39. 550봉은 우측으로 건너가고 560m봉 아래에서 점심.진눈개비가 내림.
13 : 49. 560m봉을 내려간 갈림길.좌측에 습지가는길이 있고 좌측 611m봉이 주능선같이 보이나직진하여 510m봉넘어로 삥 돌아감.
14 : 07. 좌측 611m봉에서 온길과 합류하는 시경계능선위.좀더 올라가면 591.4m봉 정점임.
14 : 12/14. 591.4m 삼각점(불국사 455).정점 바로전에 좌측 건너로 오리온목장과 운제산줄기가 조망됨.


14 : 22. 사태지역우측갓으로 지나감.맥이 거의 잘려나감.
14 : 27. 안부에서 우측계곡으로 기림사쪽으로가는 좋은길 있음.
14 : 41. 좌측 430m봉 능선갈라지고 우측으로 꺽어지면 482봉과 성황재가 보임.
14 : 55/56. 가파르게 올라선 헬기장.함월산부터 온길이 다 조망됨.
14 : 58. 482m정상 헬기장.토함산부터 온길이 다 보이고 성황재와 만리성이 조망됨.
15 : 23. 성황재.14번도로.좌측아래에 휴게소.우측은경주 양북면.좌측은 포항 오천읍.절개지를 직등하여오름.

함월산에서 좌측으로 내려와 허릿길을 만나 550봉을 우측으로 건너가선 진눈개비를 맞으며 점심을 먹고
560봉을 넘어가니 길이 흐릿하더니 갈림길이 나온다.좌측으로 표지기들이 많이 걸려있고 저앞에 611봉이 높게 보인다.
꼭 저봉이 지맥능선같으나 611봉은 지맥에서 벗어난 시계능선에 있는봉이고 좌측으로있는 좋은길은 계곡으로 내려가던지
아니면 611봉으로 오르는길이고 지맥은 직진하여 앞에있는 뾰족한 510봉을 넘어가서 좌측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이곳이 선답자들이 습지를건너 알바한다는곳이다.

510봉 오름길에 611봉과 계곡 건너편 산줄기를 뒤돌아보고 510봉을 넘어 돌아오르면 611쪽봉에서 올라오는 능선길을 만나는데 여기서부터가
경주시와 포항시의 경계가되며 국립공원의 끝이된다.이 시경계는 성황재건너 만리성에 가기전의 절뒤까지 이어진다.
시경계를 만나 우측위로 조금 더 오르면 좌측으로 오리온목장의 드넓은 개활지와 축사가 건너다보이고 바로 591.4봉의 삼각점을 만난다.
591.4봉은 공간이 좁고 전망도 없는봉으로 준희님의 표찰이 걸려있고 불국사455 삼각점이 있다.


591.4봉에서 우측으로 경사지를 내려오면 좌측이 사태가나서 능선이 거의 없어지다시피하고 남은길도 허공에뜬 기분이다.
잠시후에 우측계곡쪽으로 내려가는하산길이 보이는데 이길은 도통골로해서 기림사로 내려가는길인듯싶고
혹시나 우회길인가싶어 살펴봐도 다시는 우측에서 올라오는길은 안보인다.

430봉으로가는 갈림능선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면 482봉이 올려다보이고 좌측으론 성황재가 건너다보인다.
또 사태지역을 지나 다시 된비얄을 오르면 헬기장이 나오고 우측으로 함월산부터 지나온 능선이 건너다보이는데 정점은 좀더 나가서 있다.


482봉정상에서 다시한번 우측으로 지나온 지맥을 돌아보고 성황재건너로 이어지는 지맥과 멀리 만리성을 가름해보며 내림길로 들어선다.
중간봉 헬기장에서 다시한번 가야할 지맥을 짚어보고 성황재는 2시 방향에 보이는데 지맥은 11시방향으로 내려가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전망좋은 바위들이 나오고 내려오면 상태좋은 임도길이 나오는데 아마도 묘지로 오르는길인 듯 00묘소입구라고 쓴 표찰이 나무에 걸려있다.

임도따라 나오면 철탑을 지나 큰길에 나오고 차가 들어가지 못하게 쇠줄로 막아놓고 큰길엔 아예 철대문에 철조망을 쳐놨다.
철대문 우측으로 철조망을 밟고 내려오면 도로준공표석이 있고 고개마루 우측위론 또다른 임도가있는 성황재다.

14번도로인 성황재는 우측은 경주 양북면,좌측은 포항시 오촌면으로 포항쪽아래의 휴게소에선 연실 노래방 뽕짝이 울려온다.
지나다가 막걸리 한 잔먹고 돈내고 한곡조 뽑고가는 모양이다.지나는 차들은 많치않으나 고개는 제법높다.

510m봉오름길에뒤 돌아 본611m봉과 건너편 산줄기.
아래의 갈림길에서 좌측 습지로 가기쉽다는곳이다.우측봉인 611m봉은 지맥에서 벗어나 있다.

시경계능선을 만나 591.4m봉 바로전에 본 건너편 운제산쪽모습.

좀 땡겨본 모습이다.저농장이 지도상의 오리온목장인 모양이다.무장사지 3층석탑이 저기 어디있겠지?

591.4m봉 정상모습이다.별 볼품은 없다.넘어쪽으로도 능선은 이어지나 지맥길은 저절로 우측으로 내려간다.

사태지역인데 마루금길이 떠있는 느낌이고 더심해지면 脈이 없어질판이다.

482m봉 정상 아래의 헬기장에서 본 함월산과 토함산(좌측 나무뒤).

482m봉 정상 아래의 헬기장에서 본 611m봉과 591.4m봉과 내려온길.

 


482m 헬기장에서 뒤 돌아 본 호미지맥모습.
누르면 정지 화면이 뜹니다.

 

 

482m봉 정상 모습.

482m봉 정상에서 본 성황재(우측)넘어 만리성(정가운데봉),묘봉산(그뒷봉)으로 이어가는 지맥모습.

482m봉 정상에서 본 성황재.

482m봉 정상에서 본 토함산(맨뒤),507m봉(좌).494.1m봉(토함산앞봉).

성황재로 내려오다가 본 만리성과 390봉에서 403봉으로 이어지는 지맥모습.
가운데 제일높은봉이 만리성이고 우측위에 철탑이 403봉넘어 철탑이고 가운데 실한산줄기는 지맥이 아니다.

성황재로 내려오다가 뒤 돌아본 482m봉(좌측철탑뒤)과 591.4m봉(우측맨뒤).

성황재로 내려오다가 만나는 묘지길.

성황재.사유지인지 이렇게 철문과 철조망이 쳐져있다.우측 철조망을 밟고 내려가서 도로표지판앞 절개지로 오른다.
포항쪽저 아랫쪽에 휴게소가 있다.

15 : 23. 성황재.14번도로.좌측아래에 휴게소.우측은경주 양북면.좌측은 포항 오천읍.절개지를 직등하여오름.

15 : 44. 약 390m.예각으로 꺽어 좌측으로 내려감.양쪽 큰 산줄기 사이의 얕은 줄기임.온길과 갈길이 조망됨.
15 : 55. 성황당.좌우계곡으로 내려가는 옛길이 있음.우측은 권이리 수정사,세바시,좌측은 진전교.
16 : 17.송전탑봉.403봉 오름길이 대단이 가파르고403봉다음봉에 송전탑있음.
16 : 23. 좌측으로 90도 꺽어내려감.바로 사태지역나옴.
16 : 37/42.시경계능선 꼭지점.바로밑에 작은 암자있고 낡은 행군로 안내판있고 길은 대로가 됨.


17 : 02/04. 만리성(427m).표석과 삼각점(불국사 307)과 묘(가선대부 도은김씨)있고 갈길조망.내려서며 바로 좌측길조심.
17 : 30/5.갈평리 갈림길.갈림길 우측에 큰묘지있고 묘지윗봉에서 갈평리쪽과 묘봉산이 조망됨.


17 : 59.사당건물인듯한 집이있는 계곡의 큰길을 만남.
18 : 08.14번 도로의 갈평리 갈평2교.좌측에 갈평정수장과 갈평피정의집이 있음.
18 : 14. 갈평 피정의집.

미끄러운 마사토 절개지를 직등해 넘어가면 우측 임도쪽에서 온 큰길이 잠시 이어지고 좌측으로 방금 내려온 482봉이 건너다 보인다.
동네뒤산같은 능선을 조금나가 잠깐 오름길로 되어 390봉에 서면 우측으로 좀더 높은산들이 줄줄이 있고 좌측으로도 비슷한 높이의 산들이 보이는데
그쪽으로 지맥이 이어가지 않고 두 큰 산줄기 사이의 앝은 줄기로 지맥이 이어진다.갈길을 짚어보고 갈 필요가 있다.


온길뒤로 토함산부터 지나온 지맥줄기가 돌아보인다. 높이는 별것아닌데 큰산들이 보일건 다보인다.

실날같은 지맥을 내려오면 성황당고개의 돌무더기들이 있는것이 전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같다.
좌우계곡이 깊고 산을 휘돌아 내려가가서마을들응 보이질 않는다.우측은 권이저수지 수정사,좌측은 진전리로 가는길이다.

403봉 오름길이 대단히 가팔르고 낙엽이 잔뜩쌓여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오후부터 바람이 분다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람이 치고연신 재채기에 콧물이 줄줄흐른다.
403봉을 올라서면 앞에 쬐끔 더 높아보이는 봉에 철탑이있고 철탑을 지나면 바로 시계종주기념 표찰이 하나걸려있고
바로 길은 좌측으로 90도꺽어 내려가는데 영낙없이 계곡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조금 내려가면 또 사태지역 날등을 지난다.토질이 마사토라그런지 이번구간엔 유난히도 사태지역이 많이 나온다.

좌측에서 올라온 소로길이 보이고 절등이 하나 걸린걸보니 진전리쪽에서 암자로 들어가는 길인가보다.
좀전의 철탑에서 보이던 시경계능선인 406봉아래에있는 암자로 가는길이다.
조금 더 가면 우측에 암자가 보이고 바로위가 경주시경계의 꼭지점이며 꼭지점능선위엔 작고 낡은 행군로 표지판이 나무에 기대있다.

여기서부터는 경주시계를 벗어나 온전한 포항시계로 접어들며 경주와 포항시경계는 우측 406봉쪽으로가고 지맥은 좌측으로 가는데
능선길은 대로가되고 앞둔덕봉을 넘어서면 저만치 만리성이 건너다보인다.
좌우로 하산길이 있음직한 안부를 건너면 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보이며 오름길이 되는데
이곳이 만리성재로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쌓은 신라의 성터란다.

만리성정상엔 정상표석과 삼각점(불국사307 2007재설)이 있고 가선대부 도은김씨묘가 있다.
만리성에서 갈평리로 내려갈 하산능선과 다음구간의 묘봉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을살펴보고 경사길을 내려서면
바로 좌측 철탑쪽능선으로 갈림길이 보이는데 길이 좋아 자칫 방심하면 그길로 들어 알바하기 쉽겠다.

25분을 내려오며 혹시나 좌우로 하산길이 있나 살펴봐도 길은 안보이고 천용사로 내려가는 계곡끝지점에도 좌측으로 하산길은 안보인다.
살짝 올라서며 좌측능선으로 표지기가 걸려있고 지맥은 우측으로 꺽어 얕은 둔덕을 올라서는데 바로앞에 큰 묘지가있어 위치를 알수있겠다.
묘지 뒷봉에서 갈평리로 내려갈 능선과묘봉산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을 점검해보고 다시 묘지아래 갈림길로 내려와 우측지능선길로 들어섰다.

묘지 둘레석이 허물어져 있는 앞봉을 넘어서면 묘봉산이 가깝게 건너다보이고 내려와 좌측 천용사계곡쪽으로 하산길이 보이나
위에서 없던길이 내려가다 혹시나 사라지면 어쩌나 염려되어 좀 돌아가더라도 안전하게 우측 계곡쪽으로 내려가니
제실인듯한 집이 있는 계곡에 내려서고 계곡따라 난 수렛길은 왕래가 적은지 상태가 좋지않다.
계곡길을 따라10여분 빠져나오면 14번도로의 갈평2교에 닿는다.
좌측엔 갈평정수장과 갈평 피정의집이있고 더 올라가면 천용사와 진전저수지가 나온다.
선두는 천용사뒷계곡으로 내려왔는데 그런대로 길이 있다고 하니 다음차엔 천용사뒤로 오르는것이 제일 가까울듯싶다.

390봉에서 403봉-만리성으로 이어지는지맥모습.
좌우로 높은 산줄기를 두고 가운데 얕은줄기로 이어진다.좌측맨뒤가 427m인 만리성이고 가운데 철탑앞이 403m봉이고
철탑뒤로 살짝보이는봉이 시경계꼭지점인 406m봉이다.

390m봉에서 뒤 돌아본 482m봉에서 성황재로 내려오는 지맥모습.
멀리 토함산과 482m봉 내림길의 철탑 두 개가보인다.

390m봉에서 뒤 돌아 본 482m봉-591.4m봉-함월산.

 


390m봉에서 뒤 돌아 본 482m -591.4m-함월산-토함산 모습.
누르면 정지 화면이 뜹니다.

 

390봉에서 좌측(서북)능선.지맥은 우측 소나무아래쪽이다.

성황당고개.
성황당고개의 돌무더기들이 있는것이 전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같다.
좌우계곡이 깊고 산을 휘돌아 내려가가 서마을들은 보이질 않는다.우측은 권이저수지 수정사,좌측은 진전리로 가는길이다.

성황당고개를 지나 403m봉 오름길이 대단히 가파르고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어 미끄럽다.

403m봉 건너편의 철탑과 시경계산행기념판.

철탑근처에서 본 만리성(좌측뒷봉)과 시경계꼭지점봉인 406m봉(우).
시경계능선가운데 밑에 암자가 보인다.

철탑을 지나며 지맥은 좌측으로 90도로 꺽어 계곡같은곳으로 내려가며 사태지역을 지난다.

암자입구 근처에서 뒤 돌아 본철탑과 사태지역.

허술한 암자.

시경계 갈림지점.낡은 행군로 표지판이 있고 길은 대로로 되며 좌측으로 간다.

만리성정상모습.
만리성 오름길의 안부가지도상의 만리성재이고 만리성엔 왜군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성이 있단다.

만리성정상모습.
가선대부 고은김씨묘가와 정상표석과 삼각점이있다.

만리성정상모습.

만리성정상에서 본 갈평리 하산능선과 묘봉산모습.

하산길에 뒤 돌아 본 만리성정상.

갈평리하산길의 지표가 되는묘지.
묘지앞에서 갈평리는 좌측능선으로가고 지맥은 이 묘지뒤로 올라 저기 보이는 묘봉산쪽으로 간다.

갈평리 하산 초입.
자칫 지맥인줄 잘못알고 이 좌측길로 가기쉽겠다.

갈평리 하산길의 둘레석이 허물어진 묘.

갈평리 하산길에 우측으로 건너다본 묘봉산.

14번국도의 갈평리 갈평2교.
좌측으로 갈평정수장과 갈평 피정의집이 보이고 더 올라가면 천용사가 나온다.

갈평정수장(좌)과 갈평 피정의집(우)



◈ 돌아오는길.

날이 어두워지는 6시가 넘어서야 겨우 하산을 마치고 성황재에서 탈출하신 심회장님도 경주에서 동생분차로 이리로 넘어오셨으니 바로 출발이다.
날이 몹시 추워지고 있어 오천읍에서 따끈한 해장국으로 후딱 저녁을 먹고 갈길이 바빠 서둘러 온다고해도
천안에 오니 10시 40분 포항이 멀긴멀다.서울엔 11시 40분에 들어가서 차가 끊기기전에 겨우겨우막차를 탈 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