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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한양도성길

서울둘레길 9. 8코스 2(화계사-우이령입구-도봉산역)1完 .

서울둘레길 9. 8코스 2(화계사-우이령입구-도봉산역)1完 .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18.1km(8시간 39분).

 

◈ 일시 : 2021. 10. 05 (화).

 

◈ 지도.

 

 

 

 

 

트랙.

서울9(화계사ㅡ도봉산역)2021-10-05 0812__20211005_0812.gpx
0.11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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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정리.

 

05 : 46. 천안역에서 서울역행 급행전철로 출발.

07 : 20/29.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

07 ; 53/8.00. 수유역 3번출구에서 강북 02번 마을버스 타고.

08 : 11. 화계사앞 한신대사거리의 화계사. 한신대 신학대학원 정류장 하차.

08 : 19. 화계사일주문 통과. 바로앞에 화계중학교 .

08 : 21. 우측 계단으로 오르며 서울둘레길을 이어간다.

08 : 31. 멧돼지 차단용 철책울타리문 지나 우회길 안내판.
산허리로 다니던 기존노선은 사유지라 앞쪽 위까지 올라갔다 내려간다.

08 ; 39. 오름길끝. 시간은 8분인데 경사길이라 길게 느께진다. 우측으로 꺽어 돌길을 내려간다.

08 : 49. 영락약수터. 음용적합. 바로밑의 차도에서 우측으로

08 : 52. 차들이 있는 쉼터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우회길이 끝나는 곳이다.

08 : 58. 연리지 소나무. 좌측으로 본원정사가 살짝 보인다. 중국 후한말의 효자 채옹얘기글.

09 : 05. 현인요양병원앞에서 길건너 좌측 산으로 올라간다.

09 :13/28. 정점의 벤취에서 쉬며 간식. 공공일을 하는지 한무리의 노인들이 집게 하나씩 들고 와 쉬고간다.

09 : 30. 산을 내려간 골짜기안 공터. 우측 아래에 향운사. 여기는 3구간 흰구름길구간입니다.

09 ; 38. 통일교육원정문앞. 도로따라 좌측 위로 조금 올라가면.

09 : 40. 우측으로 순례길구간 시작점. 도로따라 대동문 방면으로 직진하면 신익희. 신하균묘가 있는듯.

09 : 43. 좌측에 이준열사묘 입구 홍살문.둘레길은 지나치지만 좌측 열사묘로 올라간다.

09 : 50. 이준열사(1859~1907)묘. 묘비와 흉상.헤이그에 있던 묘비를 옮겨왔다. 되돌아 내려간다.

09 ; 55. 다시 홍살문앞. 왕복 12분 걸린다. 개울을 건너가 김병로선생묘는 순창의 생가를 봤으니 생략한다.

09 : 58. 좌측 성재 이시영선생(1869~1953)묘와 광복군합동묘소(17위)를 다녀온다. 왕복 15분 걸린다.

10 ; 14. 청수가든앞 다리건너. 좌측 하천가를 따라 내려간다.

10 : 16. 좌측 단주(旦洲) 유림(1898~1961)선생묘를 다녀온다. 묘는 비석 좌측 넘어쪽에 있어 자칫 놋칠수 있다.
6분소요. 우측은 근현대사 기념관 가는길. 솔밭공원 2.1km.

10 ; 26. 백련공원지킴터 삼거리. 좌측으로 간다. 대동문 2.7km.

10 : 31. 갈림길. 좌측은 김창숙선생묘. 양일동선생묘. 우측은 신숙선생묘로 가는 둘레길. 좌로 가면

10 : 35. 심산 김창숙선생(1879~1962)묘.

10 ; 39. 현곡 양일동선생(1912~1980)묘. 되돌아 내려가서

10 : 44. 김창숙선생묘를 지난 좌측 서상일선생묘역 170m 김도연선생묘역 400m길로 올라간다.

10 : 49. 동암 서상일선생(1886~1962)묘.

10 : 56. 초대 재무무부장관 상산 김도연선생묘. 우측 아래에 인수재식당. 길게 내려간다.

11 : 05. 둘레길 복귀. 좌측으로 꺽어가며 휀스울타리를 한 사유지밭.

11 : 10/30. 밭끝 벤취에서 신숙선생묘지를 보며 두유에 미숫가루로 점심.

11 ; 33. 강재 신숙선생(1885~1967)묘.

11 : 40. 보광사쪽문.사산금표. 울타리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11 ; 48. 보광사. 입구에서 도봉산연봉들이 보인다. 규모가 크고 창찰 문양이 아름답다.

12 : 02. 4.19묘역옆. 4.19묘역이 내려다보이고 너랑나랑길 해설사의집과 스탬프.

12 : 12. 2구간 순례길이 끝나고 1구간 소나무숲길이 우측 아래로 이어지며 좌측 위로 도봉산이 펼쳐보인다.

12 ; 20. 솔밭공원. 좌측으로 꺽어 공원을 가로질러 간다.말그대로 솔밭이 좋다. 공연장도 있고 쉼터도 있다.

12 : 29. 궁궐담장같은 메리츠화재연수원 담장을 끼고 올라가 우측 "소나무숲길"따라 산으로 올라간다.
도로따라 직진해 올라가면 이용문장군묘소인듯. 둘레길 안내도.

12 ; 36. 소나무쉼터. 포토포인트와 벤취 몇 개.전망은 없다.

12 : 38/42. 만고강산약수터. 물보충하고나랑너랑해설사와 스팀프. 솔밭공원 0.9km. 손병희선생묘 0.9km.

12 : 55. 우측에 있는 송주사와 우이제일교회. 대한불교 보문종인 송주사는 철대문으로 닫혀있다.

13 : 03. 손병희선생묘앞. 묘소는 철망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만 보고

13 ; 07. 우이동만남의광장. 둘레길 이정표는 곧장 건너가고 우측에 너랑나랑 안내소.
좌측으로 가면 봉황각. 우이분소. 도선사. 용암문.

13 ; 18. 좌측으로 간 봉황각.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앞으로 천도교 수련장으로 쓰던곳이다.
되돌아 나가 우이분소뒤 청담교에서 백운천을 따라 내려간다.

13 ; 32. 우이령옛길입구 신우이교앞. 도로따라 우측으로 가서 좌측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13 ; 36. 우이 신설 북한산 우이역1출구. 우이천변 방학로를 따라 성원아파트뒤를 돌아 올라간다.

13 : 45. 강북구와 도봉구 경계 터널앞 . 스탬프 찍고 우측 산으로 오르며 왕실묘역길 시작.

14 ; 02. 산넘어 연산군묘. 직전은 원당샘골공원. 묘 아래엔 서울 기념물 33호인 550살된 방학동은행나무.
오늘은 대체연휴라 휴관이라 연산군묘는 들어가지 못하고 담넘어로 건노다만봤다.
10.3일 개천절공휴일이 일요일이라 어제 10.4일이 대체연휴일로 쉬는날인데
10.4일 어제가 또 공원관리 정기 휴일이라 오늘 또 대체연휴라고 또 문을 닫은 모양이다.

14 ; 09. 안맹담.정의공주묘.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그의 남편 안맹담의묘다.
정의공주는 한글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묘를 좌측에 끼고 돌아간다.

14 : 13. 방학동길시작점. 사천목씨 재실앞에서 우측 산으로 올라간다.우이령입구 1.6km. 무수골3.1km

14 ; 18. 멧돼지통제 철문을 열고 나간다.

14 : 27/52. 벤치2.에서 두유에 미숫가루와 과일로 간식을 먹으며 쉬어간다.

14 : 58. 바가지약수터. 약수터는 조금윗쪽에 있단다. 우측으로 방학초.중교하산길.

15 : 13. 오름끝삼거리. 우측으로 능선길따라 내려간다. 쌍둥이 전망대 0.5km. 정의공주묘 1.9km.

15 : 22. 쌍둥이전망대. 126m봉. 두개의 높은 타워 전망대로 도봉산과 수락. 불암산 조망이 좋다.
먹구름이 몰려가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15 ; 34. 쭈욱 내려간 안부. 좌측 폐목을 재활용한 홈통길로 내려간다.

15 : 40. 무수골. 도봉길.세일교. 방학동길이 끝나고 도봉옛길로 들아가며 세일교를 건너 좌측으로 간다.
우측 아래 무수천변엔 무수아취글랭핑 건물들.

15 : 48. 윗무수골 둘레길 통제소.차단봉이 있는 도봉옛길 산으로 올라간다. 많은 등산객들이 쉬고있다.

15 : 53. 조선초 유양의 신도비와 위에 문집시비. 그위 고개밑 진주유씨 문중묘에 묘가 있다.
세조의 등극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 아들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누렸다.

16 : 01. 고개위. 우측 전망대쉼터쪽이 아니고 그 좌측 데크길로 간다.

16 : 06. 삼거리. 좌측에 화장실. 온길은 도봉옛길 무장애탐방로(장애인이용가능한).
우측으로 마포깐 세멘길따라 내려간다.

16 : 08/19. 도봉사. 고려 광종때 창건. 유난히도 돌부처님이 많다. 사리 3과가 모셔진 뿌리탑.치성광여래삼존도.

16 : 25. 한국불교 능원사. 주전은 용화전.

16 : 31. 도봉산입구 도봉탐방지원쎈터. 마지막 스탬프.

16 ; 36. 유희경과 이매창시비.

16 : 46. 도봉산역 1번출구.

16 : 51. 2번출구앞 서울 창포원.서울둘레길안내쎈터에 들려 완주인증서와 메달.리본을 받고.
2021.7.10에 시작해서 2021.10.5일로 9회에 걸친 서울둘레길을 마친다.

17 ; 12. 도봉역 화장실에서 씻고 1호선 전철 타고

17 : 48. 청량리역에서 환승하여

20 : 18. 천안역도착.

 

05 : 46. 천안역에서 서울역행 급행전철로 출발.

07 : 20/29.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

07 ; 53/8.00. 수유역 3번출구에서 강북 02번 마을버스 타고.

08 : 11. 화계사앞 한신대사거리의 화계사. 한신대 신학대학원 정류장 하차.

 

08 : 19. 화계사일주문 통과. 바로앞에 화계중학교 .

 

08 : 21. 우측 계단으로 오르며 서울둘레길을 이어간다.

 

08 : 31. 멧돼지 차단용 철책울타리문 지나 우회길 안내판.
산허리로 다니던 기존노선은 사유지라 앞쪽 위까지 올라갔다 내려간다.

 

08 ; 39. 오름길끝. 시간은 8분인데 경사길이라 길게 느께진다. 우측으로 꺽어 돌길을 내려간다.

08: 44. 내려가며 본 도봉산.

 

08 : 49. 영락약수터. 음용적합. 바로밑의 차도에서 우측으로

 

08 : 52. 차들이 있는 쉼터에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우회길이 끝나는 곳이다.

 

08 : 58. 연리지 소나무. 좌측으로 본원정사가 살짝 보인다. 중국 후한말의 효자 채옹얘기글.

본원정사.

본원정사(本願精舍)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삼각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소속의 사찰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불 사이인 부처님 없는 시대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가 교화해 제도하는 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장보살본원경》에는 지장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한 서약의 내용이 있다. 즉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菩提)을 이루리다.”이는‘한시바삐 성불하여 부처님과 같은 거룩한 모습을 갖추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상이 다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그들을 남김없이 해탈케 한 다음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장보살의 서원은 서원(誓願) 중의 서원, 가장 근본이 되는 원으로 모든 보살과 부처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본원(本願)인 것이다. 삼각산 아래의 본원정사에는 한국전쟁 때 태고사에 불이 나서 옮겨왔다고 전하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980년대 초 주지소임을 맡은 원성스님은 이 지장보살상에 감화를 받아 지장보살의 본원을 따르고자 서원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본원정사로 바꾸었다. 이후 본원정사를 사바세계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릴 수 있는 도량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언제나 열려있는 도량으로 서울시민과 불자들에게 번잡한 마음을 쉴 수 있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도량으로 본원정사를 장엄하고 있다

 

 

09 : 05. 현인요양병원앞에서 길건너 좌측 산으로 올라간다.

 

09 :13/28. 정점의 벤취에서 쉬며 간식. 공공일을 하는지 한무리의 노인들이 집게 하나씩 들고 와 쉬고간다.

 

09 : 30. 산을 내려간 골짜기안 공터. 우측 아래에 향운사. 여기는 3구간 흰구름길구간입니다.

 

09 ; 38. 통일교육원정문앞. 도로따라 좌측 위로 조금 올라가면.

국립통일교육원.

 

09 : 40. 우측으로 순례길구간 시작점. 도로따라 대동문 방면으로 직진하면 신익희. 신하균묘가 있는듯.

 

이사진은 4.19묘지옆 전망대에서 준 강북구" 너랑.나랑. 우리랑"스탬프힐링투어 안내서에서 캡쳐한 사진인데
여기서 직진해 신익희선생묘소에서 이준열사묘, 김병로선생묘.광복군합동묘역으로 가는 길이 있는듯싶다.

김창숙선생묘. 양일동선생묘.서상일선생묘.김도연선생묠로 이어지는길도 보인다.

 

09 : 43. 좌측에 이준열사묘 입구 홍살문.둘레길은 지나치지만 좌측 열사묘로 올라간다.

09 : 50. 이준열사(1859~1907)묘. 묘비와 흉상.헤이그에 있던 묘비를 옮겨왔다. 되돌아 내려간다.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다

이준(李儁, 1859. 1. 21~1907. 7. 14)선생은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대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공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 마저 별세하여 졸지에 고아가 되었으나,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도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1888년 북청에서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다시 상경하였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의 첫발을 디디어 대관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들추어 내고 올바른 법 집행을 하여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오래있지 못하고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 가두연설 등 맹활약을 하게 된다.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동경 조도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비정탄핵(秕政彈劾) 등의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하였다가 이승만, 이동녕등 17인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2년 선생은 효율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였으며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제목하에 행한 국민대연설은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폐하다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상설, 송수만, 원세성 등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조직, 격렬한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선생은 안창호, 이상재와 함께 연설과 웅변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의 성격을 띤 대한협동회를 조직, 그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은 선생이 총무는 정운복, 평의장은 이상재, 선무부장은 이동휘, 편집부장은 이승만,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위 등이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8월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 분자들로 하여금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12월 12일 선생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열사는 회장으로서 반(反)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의해 황해도 황주 철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급파,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모의하여 마침내 동년 11월 17일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소위 을사오조약의 늑결을 강행하였다는 것, 이에 비분강개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고 중국 상해에서 즉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을사조약에 대한 폐기를 상소하는 운동을 펼치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기울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해 3월 대한자강회가 창립되자 선생은 이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안창호, 김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헤이그에 특파되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선생은 주위 도움을 받고 비밀리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이다. <출처: prix at ko.wikipedia.org>

선생보다 먼저 출발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러시아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여 러시아 공사 이범진을 만났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전이 박탈당하였으나 세계정세를 관망하기 위하여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체재하고 있었다. 한편 선생은 1907년 4월 22일 가족들과의 고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울역을 떠나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으며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6월 4일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빼째르부르그에 도착한 선생과 이상설은 이범진, 이위종을 만나 그간의 경과에 대하여 토론하며 [장서]의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번역한 후 6월 19일 그곳을 출발하여 독일 베를린에 들려 [장서]를 인쇄하고 동월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De 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다.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으며, 그 다음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Nelidov) 백작을 방문하였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30일에는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아 거절당하고 말았다.

통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다. 당시 참가국은 46개국이고 대표는 약 247명이었다. 이상설을 비롯한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인 공고사를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세 특사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각국대표와 언론에 공개하자 각국 언론들은 동정적이었으나 열강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 하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으며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으로 하여금 불어로 연설하도록 하였다. 이위종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공감하지 않자, 선생은 분격을 금하지 못하고 연일 애통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준 [李儁] - 헤이그 밀사로 특파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09 ; 55. 다시 홍살문앞. 왕복 12분 걸린다. 개울을 건너가 김병로선생묘는 순창의 생가를 봤으니 생략한다.

김종인님의 부친이시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大法院長)을 지낸 한국의 법조인·정치가. 변호사가 되어 6·10만세운동 등 관련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다. 8·15광복 후 한민당(韓民黨) 창설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의 대표,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본관 울산(蔚山), 호 가인(街人)이다. 전라북도 순창(淳昌)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용추사(龍湫寺)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동지들을 모아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같은 해 창흥학교(昌興學校)를 설립,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1910년에 도일(渡日), 1913년에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고 일본 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다. 경성법전(京城法專) 조교수와 보성전문(普成專門) 강사를 역임, 19년에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6·10만세운동, 원산파업사건(元山罷業事件), 단천노조사건(端川勞組事件) 등 관련자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8·15광복 후 한민당(韓民黨) 창설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고 1948년에 초대 대법원장(大法院長)에 취임하였다. 1957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의 대표,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병로 [金炳魯] (두산백과)

 

09 : 58. 좌측 성재 이시영선생(1869~1953)묘와 광복군합동묘소(17위)를 다녀온다. 왕복 15분 걸린다.

광복군합동묘소. 17인의 합동묘로는 너무 초라하다.

 

이시영선생묘소.

이시영선생묘비. 저위가 묘소. 이곳 좌측에 광복군합동묘소.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재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의 묘이다. 손병희, 신익희, 김창숙, 이준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가운데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이시영은 1953년 서거하여 9일간의 국민장을 치른 뒤 서울 정릉 남쪽에 안장되었고, 그 후 11년이 지난 1964년 현재의 위치인 북한산 자락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묘역은 높게 쌓은 축대 위에 마련되었으며, 묘비, 혼유석, 상석, 망주석, 향로석, 장명등, 석인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입구 계단 아래에 세워져 있는 묘비 앞면에는 ‘省齋先生慶州李公始榮之墓(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이시영의 묘 바로 아래에는 중국 각 지역에서 전사, 순국한 광복군 17위의 유골을 안장한 광복군합동묘소가 있다.

대대로 권력과 명예, 부를 누리던 명문거족의 후손으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등 여섯 형제 일가 50여 명과 함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투신한 이시영의 공훈을 기리고 그의 애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있다. 2012년 10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16호로 지정되었다.

 

 

10 ; 14. 청수가든앞 다리건너. 좌측 하천가를 따라 내려간다.

 

10 : 16. 좌측 단주(旦洲) 유림(1898~1961)선생묘를 다녀온다. 묘는 비석 좌측 넘어쪽에 있어 자칫 놋칠수 있다.
6분소요. 우측은 근현대사 기념관 가는길. 솔밭공원 2.1km.

유림선생묘비. 묘는 좌측위에

유림(柳林, 1898년 5월 23일 ~ 1961년 4월 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독립노농당을 창당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본명은 유화종(柳花宗), 또는 유화영(柳華永), 호는 단주(旦洲)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유화종(柳花宗)이었으나 1919년 3월 6일 유화영(柳華永)으로 개명했다.[2]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자 유림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맹세였다.

 

유림선생묘.

 

섶다리와 단주 유림선생묘비.

 

10 ; 26. 백련공원지킴터 삼거리. 좌측으로 간다. 대동문 2.7km.

 

10 : 31. 갈림길. 좌측은 김창숙선생묘. 양일동선생묘. 우측은 신숙선생묘로 가는 둘레길. 좌로 가면

 

10 : 35. 심산 김창숙선생(1879~1962)묘.

김창속선생묘소.

김창숙(金昌淑, 1879년 8월 27일 (음력 7월 10일)[1] ~ 1962년 5월 10일)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정치가, 시인 겸 교육자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字)는 문좌(文佐)이며 호(號)는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成均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김우(金愚)'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0 ; 39. 현곡 양일동선생(1912~1980)묘. 되돌아 내려가서

호는 현곡(玄谷)이다.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33년 베이징[北京] 민둬고등학교[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하고, 8·15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이어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연속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新民黨) 원내총무·정무위원을 역임하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정통야당으로 자처해 오던 신민당이 정통성 시비로 내분에 휘말리자 1973년 반진산계(反珍山系)가 뭉쳐 민주통일당을 창당, 그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77년 민주통일당 총재에 취임하여,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 5선의원이 되었다.

 

 

 

양일동선생묘. 우측 높이 올라가 있다.

 

10 : 44. 김창숙선생묘를 지난 좌측 서상일선생묘역 170m 김도연선생묘역 400m길로 올라간다.

 

10 : 49. 동암 서상일선생(1886~1962)묘.

호 동암(東菴). 대구 출생.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다.

1948년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하여,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개헌안을 발기, 최초로 헌법개정안을 제기하였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활동을 못 하다가 서울에서 병사하였다. 그 동안 한때 혁신계 사회민주주의 정당활동을 벌여 진보당(進步黨)·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등에 관계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10 : 56. 초대 재무무부장관 상산 김도연선생묘. 우측 아래에 인수재식당. 길게 내려간다.

김도연선생묘소.

제단에 하얀 제물이 놓여 있어 깜짝 놀랐는데 다가가보니 백구 3마리가 제단근처에서 나온다.
들개인줄 알았더니  바로밑에 인수재라는 식당이 있는걸보니 이집 개들인 모양이다.

상산(). 경기 김포() 출생. 1913년 일본 긴조[]중학 졸업,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하였다. 1927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석사, 1931년 아메리칸대학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1932년 연희전문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2월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고,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는 한국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 국회 개원과 함께 재정경제분과위원장에 선출되었다가 8월 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하였고, 한편 한 ·미경제협정교섭 한국측 대표로 활약하였다. 2대 민의원선거에서는 낙선하였고, 1954년 민주국민당 최고의원으로 취임, 3대 민의원 의원 당선 후 1955년에는 민주당 고문이 되었다. 4대 민의원선거에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9년 11월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그 해 8월 제1차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민의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였다.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 그 해 11월 신민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하였다.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선거 때는 민중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그 해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서로 《나의 인생백서》(자서전) 《한국농촌경제》(박사학위 논문)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도연 [金度演] (두산백과)

 

 

11 : 05. 둘레길 복귀. 좌측으로 꺽어가며 휀스울타리를 한 사유지밭.

 

 

11 : 10/30. 밭끝 벤취에서 신숙선생묘지를 보며 두유에 미숫가루로 점심.

 

11 ; 33. 강재 신숙선생(1885~1967)묘.

독립 운동가. 1920년 상하이로 가서 천도교를 전파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참여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북만주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했고 홍진 · 지청천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고 총무위원장 ·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초명은 태련(泰鍊)이고, 개명은 태치(泰癡)이다. 호는 강재(剛齋) ·시정(是丁) ·치정(癡丁)이다. 경기 가평군에서 출생했다. 1903년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으며, 1905년 《국민신보》 기자로 있으면서 김남수(金南壽) 등과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 교감으로 학교 운영에 참여하였다. 1912년 천도교 종학강습소(宗學講習所) 간사가 되었으며, 1917년에는 중앙대종사(中央大宗司) 종법원(宗法員)이 되었다. 1919년 보성사(普成社)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 이를 교정하고, 또 배포하다가 붙잡혔으며,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상하이로 가서 천도교를 전파하였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참여하였으나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1925년에는 북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에는 홍진(洪震) ·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무위원장 ·문화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33년에는 한국독립당이 편성한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난징[南京] ·상하이 등지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와 협력하였다. 1935년 만주로 오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며, 1936년 보석으로 풀려났다. 1945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오광선(吳光鮮) 등과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 그 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숙 [申肅] (두산백과)

 

 

신숙선생묘. 석양이 있다.

 

11 : 40. 보광사쪽문.사산금표. 울타리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보광사입구에서 본 도봉산.

 

11 ; 48. 보광사. 입구에서 도봉산연봉들이 보인다. 규모가 크고 창찰 문양이 아름답다.

보광사(普光寺)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76-19번지 삼각산에 자리한 재단법인 선학원 소속사찰이다.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숲을 이룬 우이동의 솔밭공원을 지나 포장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삼각산 기슭에 자리한 보광사에 닿는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숲의 한가운데였지만 지금은 도심과 바로 이웃하고 있어 산을 한참이나 올라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보광사는 1788년(정조 12)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신원사를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일부 건물만이 남아 법등을 겨우 이어 왔었다. 그러던 것을 1979년 남산당(南山堂) 정일(正日) 스님이 포교의 원을 세우고 이곳에 주석하면서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11월 보광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스님은 가람을 일구어 오늘의 모습이 되도록 하였고, 대승경전산림법회와 참선법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선법을 전하여 스스로 바른 길을 찾게 하였다. 이로서 보광사는 스님의 발원대로 명실상부한 포교의 도량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중 교화에 혼을 쏟으셨던 정일스님은 세연이 다해 2004년 열반에 드시고 말았다. 이후 보광사 대중들은 보다 발전적인 모습으로 스님의 뜻을 이어나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광사 보광선원(서울)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대웅전.

용이 살이있는듯

 

관음전.

앞의 큰 건물안. 대적광전인가?

 

12 : 02. 4.19묘역옆. 4.19묘역이 내려다보이고 너랑나랑길 해설사의집과 스탬프.

 

1961년 제2공화국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1960년 발생한 4·19 혁명 기념 공원묘지 조성에 대해 의결하였다. 그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하여 1962년 기공식을 가졌다. 준공일은 1963년 9월 20일이며 이날 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묘지의 부지는 처음 조성 당시에는 약 3천 평이었으나 1990년대김영삼 정부가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여 조형물을 추가하고 약 4만 평으로 확장했다. 1995년에는 국가보훈처로 관리가 이전되었다.

목조 건물인 유영봉안소와 묘지, 4·19혁명기념관,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상징문과 그밖의 상징조형물로 이루어져 있다. 성역공간과 사용공간은 상징문으로 구분된다.

 

스탬프 4개를 찍어오면 근처 식당.카페등에서 10프로 할인해 준단다.

 

12 : 12. 2구간 순례길이 끝나고 1구간 소나무숲길이 우측 아래로 이어지며 좌측 위로 도봉산이 펼쳐보인다.

솔밭공원으로 내려가며 본 도봉산.

만장봉. 신선대.

12 ; 20. 솔밭공원. 좌측으로 꺽어 공원을 가로질러 간다.말그대로 솔밭이 좋다. 공연장도 있고 쉼터도 있다.

길건너 이골목으로 들어가 담장을 우측에 끼고 간다.

 

12 : 29. 궁궐담장같은 메리츠화재연수원 담장을 끼고 올라가 우측 "소나무숲길"따라 산으로 올라간다.
도로따라 직진해 올라가면 이용문장군묘소인듯. 둘레길 안내도.

 

12 ; 36. 소나무쉼터. 포토포인트와 벤취 몇 개.전망은 없다.

 

12 : 38/42. 만고강산약수터. 물보충하고나랑너랑해설사와 스팀프. 솔밭공원 0.9km. 손병희선생묘 0.9km.

수락산조망.

 

12 : 55. 우측에 있는 송주사와 우이제일교회. 대한불교 보문종인 송주사는 철대문으로 닫혀있다.

대한불교보문종인 송주사.

서울 보문동(普門洞) 보문사에서 1972년 비구니 이긍탄(李亘坦)이 창종(創宗)한 불교 종단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비구니 종단이다.

한국 불교의 27개 종단의 하나이며, 속칭 ‘탑골승방’이라 한다.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대애도니(大愛道尼:Mahāprajāpati)를 종조(宗祖)로, 신라 때의 비구니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1972년 7월 종단의 초대 종정에 설월당 긍탄 스님이 취임하였고 총무원장에 보암당 은영 스님이 취임하였다. 본사는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이다. 이 종단은 석가불의 근본 구제이념과 관음보살의 구제사상에 의거한 복지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본존불(本尊佛)은 석가불·관세음보살이며, 근본경전은 《관음경(觀音經)》인데,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경전(大乘經典)도 중요시한다. 종단기구로는 종무의 집행기관인 총무원, 감사기관인 규정원(糾正院), 의결기구인 심의회 등이 있으며, 주요 행사는 불교의 일반적인 축절 외에 음력 매월 18일의 지장회(地藏會)와 24일의 관음회(觀音會)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불교보문종 [大韓佛敎普門宗] (두산백과)

 

13 : 03. 손병희선생묘앞. 묘소는 철망문이 닫혀있어 들여다만 보고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병희 [孫秉熙] (두산백과)

 

 

저위에 묘소가.

 

13 ; 07. 우이동만남의광장. 둘레길 이정표는 곧장 건너가고 우측에 너랑나랑 안내소.
좌측으로 가면 봉황각. 우이분소. 도선사. 용암문.

길건너가 우이동만남의 광장

 

 

13 ; 18. 좌측으로 간 봉황각.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앞으로 천도교 수련장으로 쓰던곳이다.
되돌아 나가 우이분소뒤 청담교에서 백운천을 따라 내려간다.

건물뒤에 봉황각.

1912년 6월 19일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2∼1922)가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며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었다. 1912년 4월 15일부터 지방에서 21명을 선발하여 수련을 시켰으며, 1914년 4월까지 3년간 총 483명을 수련시켰다. 당시 이곳에서 훈련받았던 인사들이 3·1운동을 지도하는 각 지역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으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봉황각과 부속건물에는 그 당시 유물이 남아 있다.

봉황각은 총 7칸 규모로 목조 기와로 된 한옥이며 건물은 을(乙)자형이다. 봉황각 현판의 ‘鳳’자와 ‘凰’자는 각각 중국 명필 안진경미불이 쓴 것을 채자한 것이고, ‘閣’자를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수봉백운대로 가는 입구에 있으며, 이곳 전면 약 50m 지점에 손병희의 묘가 있다.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민족의 성지로서 재인식되고 있으며, 후세들의 역사탐방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으며, 천도교에서 관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황각 [鳳凰閣] (두산백과)

 

 

 

 

 되돌아 나가 우이분소뒤 청담교에서 백운천을 따라 내려간다. 

북한산 동쪽 우이동에 있는 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주변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우이천(계곡천)이 동쪽 우이동으로 흘러내리면서 계곡을 이루는 곳이다. 계곡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주변은 숲으로 울창하며 작은 폭포와 못이 군데군데 생성되어 있고 넓직한 암반과 암벽에는 조선시대 명사들이 남긴 석각들이 새겨져 있다.

예전부터 이곳의 맑은물과 작은 폭포는 여름 별장지로 각광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수재정(水哉亭),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의 정자가 있었다.

특히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42~1802)는 우이동계곡을 9개의 계곡으로 구분하여 우이동구곡(牛耳洞九曲)이라고 불러 찬양했다.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라고 부르는 폭포인데 수십미터 높이의 암벽에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1690~1752)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주진(李周鎭,1692~1749)과 그의 아들 좌의정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각석이 새겨져있다.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이라고 이름지었는데 만경폭에서 흘러내린 물이 석벽에 부딪혀 모이는 곳이다. 제3곡은 바위 봉우리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큰 바위인 진의강(振衣岡), 제5곡은 큰 바위에 물이떨어지는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계곡물이 모여 연못을 이루는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옥탄(鳴玉灘),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우이동계곡은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북한산 등산로이고 여름이면 계곡을 따라 휴양객이 많이 찾는다. 계곡을 따라 백운대매표소를 지나 오르면 도선사로 이어지고 용암문을 거쳐 노적봉, 만경대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도선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하루재를 지나 영봉이 나온다. 계곡의 초입에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이동계곡 [牛耳洞溪谷] (두산백과)

 

 

삼각산 도당굿은 도봉구 지역을 비롯한 삼각산(三角山)[백운봉·인수봉·만경봉]의 주변 마을에서 당주 무당을 초빙하여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지내는 굿이다. 도당굿이란 경기도 지역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던 대표적인 마을굿의 명칭이다. 따라서 ‘삼각산 도당굿’이라는 명칭을 볼 때 과거 우이동 등이 서울이 아닌 경기도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삼각산은 행정 구역상으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속해 있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도봉구 방학동과 쌍문동에,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남쪽으로는 강북구 수유동에 잇대어 있다. 삼각산이 여러 지역에 잇대어 있는 것처럼 삼각산 도당굿을 관장하는 지역 역시 강북구 우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잇대어 있는 도봉구 인접 지역과 경기도 고양시 인접 지역까지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삼각산 도당굿의 당주 무당은 박명옥이고, 전대의 김명석[별호: 꽃방집]은 삼각산 도당굿과 방학동 원당 마을 도당굿의 당주 무당이었다. 따라서 삼각산 도당굿과 방학동 원당 마을 도당굿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강북구와 도봉구로 다른 지역으로 묶이지만 동일 권역의 마을굿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삼각산 도당굿에 대한 최초의 문헌 자료는 1937년 조선 총독부에서 출간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1891~1968]의 『부락제(部落祭)』이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인 삼각산 인근의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주신(主神)인 도당 산신의 신체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252 뒷산에 위치한 여러 그루의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신목 옆에는 신바위 혹은 산신암이라고 하여 바위가 함께 있다.

절차

‘황토물림→ 산신제→ 부정 및 가망 청배→ 산맞이→ 천궁맞이→ 장군거리→ 제석청배→ 작두거리→ 제석거리→ 사냥놀이→ 산신군웅거리→ 소지→ 산신배웅→ 성주거리→ 창부거리→ 계면거리→ 뒷전거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중 사냥놀이, 산신군웅거리, 산신배웅 등이 당굿의 특징을 보여 준다. 도당굿의 주신인 도당은 산신이거나 산신 계열이기 때문에 산신과 관련된 의례인 사냥놀이, 산신군웅거리, 산신배웅 등을 중요하게 연행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작두거리의 경우는 현재 삼각산 도당굿에서만 전승되고 있는 거리이다. 삼각산 도당굿의 경우 서울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작두거리를 통해 이북 굿과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삼각산 도당굿은 삼각산 도당제 전승 보존회가 주관하고 있으며, 매년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삼각산 산신을 모시고 있던 우이동 뒷산 마을에서 개최하고 있다. 2010년 11월 서울특별시 무형 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각산 도당굿 [三角山都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