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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한양도성길

서울둘레길 9. 8코스 2(화계사-우이령입구-도봉산역)2完 .

서울둘레길 9. 8코스 2(화계사-우이령입구-도봉산역)2完 .

앞장에 이어서.

 

13 ; 18. 좌측으로 간 봉황각.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앞으로 천도교 수련장으로 쓰던곳이다.
되돌아 나가 우이분소뒤 청담교에서 백운천을 따라 내려간다.

손병희선생묘앞 도로에서 좌측 봉황각을 가지않고  도로를 건너 만남의 광장을 가로 질러온 길이 이리로 나온다.

백운천.

 

이런집도 있고. 근처에 빗물저금통시설 안내도가 있다.

 

13 ; 32. 우이령옛길입구 신우이교앞. 도로따라 우측으로 가서 좌측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13 ; 36. 우이 신설 북한산 우이역1출구. 우이천변 방학로를 따라 성원아파트뒤를 돌아 올라간다.

우이역 1번출구. 도로따라 우측 산모랭이를 돌아 오른다.

 

1번출구에서 본 우이령.

 

13 : 45. 강북구와 도봉구 경계 터널앞 . 스탬프 찍고 우측 산으로 오르며 왕실묘역길 시작.

뒤돌아 보면

 

 

14 ; 02. 산넘어 연산군묘. 직전은 원당샘골공원. 묘 아래엔 서울 기념물 33호인 550살된 방학동은행나무.
오늘은 대체연휴라 휴관이라 연산군묘는 들어가지 못하고 담넘어로 건노다만봤다.
10.3일 개천절공휴일이 일요일이라 어제 10.4일이 대체연휴일로 쉬는날인데
10.4일 어제가 또 공원관리 정기 휴일이라 오늘 또 대체연휴라고 또 문을 닫은 모양이다.

직전의 원당샘골공원.

 

서울 연산군 묘는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배위(配位) 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의 무덤이다. 대군(大君)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왕릉이 아닌 ‘묘’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넓은 영역의 가장 상단에 연산군과 거창 군부인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바로 아래에는 태종(太宗)의 후궁인 의정 궁주 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과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묘가 있다. 묘역의 입구에는 재실이 있다. 재실에는 ‘연산군 묘려 중건기(燕山君墓閭重建記)’와 ‘갑오 오월 일 십사 일 대신 비국당상 입대 시(甲午五月日十四日大臣備局堂上入侍時)’, ‘을미 삼월 초사 일 좌직 승지 입시 시(乙未三月初四日坐直承旨入侍時)’라는 제(題)의 현판이 걸려 있다.

연산군 묘의 초장지(初葬地)는 유배지이었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 부군당(府君堂) 인근에 있었다. 1512년(중종 10)에 부인인 거창 군부인 신씨가 양주 해촌(海村)[원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할 것을 청하여 1513년(중종 8) 대군의 예로 개장하였다. 이후 1524년(중종 19) 연산군의 사위인 구문경과 딸 휘순 공주의 무덤이 이곳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1537년(중종 32) 거창 군부인 신씨의 묘가 연산군의 봉분 동쪽에 마련되었다.

한편, 의정 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 바로 아래에 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즉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 대군(臨瀛大君)이 이 땅을 사패지로 받으면서 왕명에 의해 임영 대군이 후사가 없던 의정 궁주의 제사를 모시게 됨에 따라 1454년(단종 2) 현 위치에 의정 궁주 조씨의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임영 대군의 외손녀인 거창 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 궁주의 묘 위쪽에 연산군 묘역이 이장되어 마련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연산군 묘 [-燕山君墓]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연산군묘.

550살된 서울시 기념물 33호며  서욼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서울시 보호수 1호인 방학동 은행나무.

뺑둘러 행사용 시가 걸려있어 그 사이에 낀 이 표지판 찾는데 애를 먹었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여 많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명성 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떠날 때 치성을 준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경복궁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 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 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전해지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나무인데 나무의 5m 정도에 나무줄기가 옆으로 살짝 뻗어 위로 올라간 큰 가지 아래로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모양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돌출되어 있다. 자식이 없거나 아들이 없는 집에서 남자 성기 모양의 가지를 잘라 가서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여 가지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의 젖이 잘 나오게 된다고 믿었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여 많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명성 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떠날 때 치성을 준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며, 경복궁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 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 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전해지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나무인데 나무의 5m 정도에 나무줄기가 옆으로 살짝 뻗어 위로 올라간 큰 가지 아래로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모양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돌출되어 있다. 자식이 없거나 아들이 없는 집에서 남자 성기 모양의 가지를 잘라 가서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여 가지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의 젖이 잘 나오게 된다고 믿었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수백년 넘게 푸름을 자랑해 오다가 1990년대 초부터 부근에 빌라와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생장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는 긴급히 네 차례에 걸쳐 썩은 가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다. 다시 진단한 결과 정상적인 뿌리의 생육을 위해 나무 인근의 빌라 2동을 철거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도봉구는 빌라 철거에 대한 보상비와 공원 조성비 등을 포함해 모두 40여억 원의 예산을 들였다.

2012년 현재 빌라 2동 12가구를 매입해 철거를 하고 약 1,421.49㎡[430평]의 정자 공원을 만들어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주축이 되어 정월 대보름날 제를 지내 왔으나, 2012년 현재는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제를 지내고 있다.

한편 방학동 은행나무는 국립 산림 과학원의 과학적 수령 조사 결과 550년[±50년]으로 측정되었다. 그동안 외과 수술로 줄기의 원형이 약간 변형되고 가지가 정리되는 등 나무 갓 역시 원형과 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령 측정을 위해 채취한 목편[core]의 상태를 볼 때 수간 중심부가 부후되지 않아 생장 상태 또한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방학동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이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수형도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2013년 3월 28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방학동 은행나무의 총 면적 20㎡이며, 보호 구역 지정 대상은 총 548㎡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방학동 은행나무 [放鶴洞銀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4 ; 09. 안맹담.정의공주묘.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그의 남편 안맹담의묘다.
정의공주는 한글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묘를 좌측에 끼고 돌아간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도봉산 남쪽의 작은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 있다.

나란히 자리잡은 쌍분의 묘앞에는 ‘수록대부연창위시양효공안맹담지묘(綏祿大夫延昌尉諡良孝公安孟聃之墓)’와 ‘정의공주지묘(貞懿公主之墓)’라고 각각 새긴 묘갈과 상석이 있으며, 장명등과 문인석 4구가 서 있다.

이 지역은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안의 묘역으로서 많은 분묘와 석비들이 산재해 있어 조선시대 가족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이 묘소터는 고려의 상장군 강택(姜澤) 부부의 묘지였다고 한다. 1462년(세조 8) 양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풍수가를 전국에 보내 묘자리를 찾았는데, 지금의 자리인 양주 해동촌 자좌원(楊州海東村子坐原)을 명당자리로 지목하였다.

이에 공주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을 재촉해 그 자리를 잡게 해달라고 세조에게 아뢴 후 허락을 받아 강택의 묘를 옮기고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신도비의 형태는 거대한 화강석 귀부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과 이수가 한 돌로 된 통비이다. 이수는 여의주를 놓고 쌍룡이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지대석 위에 놓인 귀부는 경복궁 안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으로, 거북 조각은 강인하면서 매우 정교하고 뛰어나다.

신도비의 총 높이는 382cm, 비신의 높이는 187cm, 폭은 104cm, 두께 26cm로 비문의 끝에 ‘成化二年丙戌立(성화2년병술립)’의 기록으로 보아 1466년(세조 12)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전액과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빈세(貧世)가 썼다. 현재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우나 전문이 전해지고 있다.

안맹담은 함길도도관찰출척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1428년(세종 10) 부마가 되어 죽성위(竹城尉)에 봉해졌다가 이어 연창군(延昌君)·연창위(延昌尉)로 개봉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수록대부에 올랐다.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활도 잘 쏘고 음률과 약물에도 밝았다 한다. 공주는 1477년(성종 8)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해 공주의 원찰로 삼각산 동쪽에 도성암(道成庵, 현 도선사로 추정됨)이 창건되었다. 묘역의 방학로 길 건너 맞은 편에는 연산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1982년 11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효안공신도비부묘소 [良孝安公神道碑附墓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측 차 뒤가 방학동길 시작점.

 

14 : 13. 방학동길시작점. 사천목씨 재실앞에서 우측 산으로 올라간다.우이령입구 1.6km. 무수골3.1km

 

14 ; 18. 멧돼지통제 철문을 열고 나간다.

 

 

14 : 27/52. 벤치2.에서 두유에 미숫가루와 과일로 간식을 먹으며 쉬어간다.

14 : 58. 바가지약수터. 약수터는 조금윗쪽에 있단다. 우측으로 방학초.중교하산길.

 

15 : 13. 오름끝삼거리. 우측으로 능선길따라 내려간다. 쌍둥이 전망대 0.5km. 정의공주묘 1.9km.

15 : 22. 쌍둥이전망대. 126m봉. 두개의 높은 타워 전망대로 도봉산과 수락. 불암산 조망이 좋다.
먹구름이 몰려가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쌍둥이 전망대.

쌍둥이 전망대에서 도봉산.

도봉산 병풍바위(좌)-만장봉-포대능선

쌍둥이 전망대에서 수락산.

 

쌍둥이 전망대에서 용마산. 아차산.

 

먹구름이 몰려오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15 ; 34. 쭈욱 내려간 안부. 좌측 폐목을 재활용한 홈통길로 내려간다.

 

15 : 40. 무수골. 도봉길.세일교. 방학동길이 끝나고 도봉옛길로 들아가며 세일교를 건너 좌측으로 간다.
우측 아래 무수천변엔 무수아취글랭핑 건물들.

우측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다리건너 우측 전봇대앞이 윗무수골 둘레길 통제소.

 

15 : 48. 윗무수골 둘레길 통제소.차단봉이 있는 도봉옛길 산으로 올라간다. 많은 등산객들이 쉬고있다.

 

15 : 53. 조선초 유양의 신도비와 위에 문집시비. 그위 고개밑 진주유씨문중묘에 묘가 있다.
세조의 등극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 아들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누렸다.

유양의 신도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유(之柔). 아버지는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使)를 역임한 유자해(柳子偕)이고, 어머니는 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넷째 딸이자 세종 비인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부인은 정즙(鄭楫)의 딸인 청주 정씨(淸州鄭氏)이며, 슬하에 유첨정(柳添汀)·유순정(柳順汀) 등 네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딸은 세종의 손자인 영춘군(寧春君) 이인(李仁)의 배필이 되어 이희(李禧)·이기(李祺)·이정(李禎)·이의(李禕)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유양(柳壤)은 아버지 유자해와 함께 세조의 즉위 과정에 참여하였으며, 1455년(세종 27) 그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 조에는 무주 현령과 서천 군사를 역임하였고, 1464년(세조 10)에는 경상도 채금 별감으로 부임하였다. 성종 조에는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활동한 뒤 담양 부사와 광주 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역임하였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진주 유씨 묘역 내 동편에 큰아들 유첨정(柳添汀), 손자 유보(柳溥)의 묘와 함께 있다. 묘 앞에는 1538년(중종 33) 건립된 운수형의 묘비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 청천 부원군 행통훈대부 상의원 정유공지묘(贈純忠積德秉義寶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君行通訓大夫尙衣院正柳公之墓)’와 ‘정경부인 청성 정씨지묘(貞敬夫人淸成鄭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비신 후면에 있는 음기(陰記)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유양의 셋째 아들 유순정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공적으로 현달(顯達)하면서 가문이 크게 알려졌다. 1506년(중종 1) 유순정이 의정부 우의정 겸 판병조(議政府右議政判兵曹)에 임명되면서 3대의 추증(追贈)이 이루어진 결과 유양의 관작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양 [柳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여기가 진주유씨 문중묘.

 

16 : 01. 고개위. 우측 전망대쉼터쪽이 아니고 그 좌측 데크길로 간다.

어느 묘지에 있을  문인상이 ?

 

16 : 06. 삼거리. 좌측에 화장실. 온길은 도봉옛길 무장애탐방로(장애인이용가능한).
우측으로 마포깐 세멘길따라 내려간다.

좌측 윗쪽.

 

16 : 08/19. 도봉사. 고려 광종때 창건. 유난히도 돌부처님이 많다. 사리 3과가 모셔진 뿌리탑.치성광여래삼존도.

연리지.

사지 3과가 모셔진 뿌리탑과 대웅전

용이 머리만 있는게 아니고 몸통까지 있다.

대웅전.

극락정사과 영가를 위한 영탑(납골탑).

 

도봉사(道峰寺)는 고려 시대인 968년(광종 19)에 혜거 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였으며, 971년(광종 22) 광종(光宗)이 여주 고달사와 희양산 봉암사, 양주 도봉사 세 곳을 특별 선원으로 삼았다. 현종(顯宗) 때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도봉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번 소실되었으며, 그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조선 말 고종(高宗) 때 승려 벽암(碧巖)이 법당과 부속 건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봉사를 내려오면서 길가에 있는 글귀들.

 

16 : 25. 한국불교 능원사. 주전은 용화전.

용화전과 철웅당.

용화전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신 건물을 용화전(龍華殿) 혹은 미륵전이라고 한다. 미륵전은 법상종의 맥을 이은 사찰에서 본전으로 삼고 있으며, 미륵불이 출현하는 곳이 용화세계의 용화수 아래이므로 용화전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장륙존상을 모신다 하여 장륙전(丈六殿)이라는 이름도 있다.

용화전에는 도솔천에서 설법하면서 장차 성불하여 중생들을 교화한다는 미륵보살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다. 이때 미륵불은 항마촉지인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더러는 입상으로도 봉안된다. 후불탱화로는 미륵불이 용화세계에서 3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하는 내용을 담은 용화회상도가 봉안된다.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미륵전은 국보 제62호 금산사 미륵전이다. 전3층으로 되었는데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라고 해서 각층의 편액이 다르나 모두 미륵불을 봉안한 법당임을 알 수 있다. 이 미륵전은 근대 신흥종교인 증산교와 용화교 계통의 종교들이 발생한 근원지이기도 하다. 특히 증산교를 일으킨 강일순은 평소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면서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통도사의 용화전은 1369년(공민왕 18년)에 초창되었다가 1725년(영조 원년)에 청성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미륵불은 좌상으로 높이가 2m 정도에 이른다.

 

 

16 : 31. 도봉산입구 도봉탐방지원쎈터. 마지막 스탬프.

도봉탐방지원쎈터.

 

16 ; 36. 유희경과 이매창시비.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비록 하층민이었지만 양주 목사로서 도봉 서원을 건립한 남언경(南彦經)에게서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국상(國喪)에 자문할 정도로 예(禮)에 밝았으며 도봉 서원(道峯書院) 설립에도 간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품계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에까지 올랐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을 남겼다.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기생으로 황진이(黃眞伊),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이름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 혹은 계랑으로 썼다. 시와 가야금에 능하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으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라는 명시를 남겼다. 뒷사람들이 『매창집(梅窓集)』을 묶었다. 전라북도 변산 반도의 개암사(開巖寺)에 그 목판이 전한다.

유희경 이매창 시비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문화 관광과에서 2012년 9월 13일 설치한 유희경과 이매창의 기념 시비(詩碑)의 이름이다. 17세기 초 도봉(道峯)의 산수를 사랑해서 도봉 서원 인근에 임장(林莊)을 지어 기거하다 여생을 마친, 당대의 문장가 유희경과 전라북도 부안군 태생의 이매창이 주고받은 사랑 노래를 새긴 것이다.

 

 

유희경과 이매창이 생전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받은 대표적인 시를 새겨 넣었다. 좌우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왼쪽에는 유희경의 한시 「매창을 생각하며」를 번역과 원문으로 나누어 세로 글로 실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낭가재낭주(娘家在浪州)[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오른편에는 이매창의 시조 「이화우 흩뿌릴 제」 전문을 역시 세로 글로 새겼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유희경 이매창 시비는 가로 1.4m, 세로 1.7m의 대리석 기단 위에 가로 1.2m, 세로 1.7m 크기의 청동 구조물로 제작하였다. 본래 하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의 숭고한 사랑과 그리움을 나타내고자 가운데를 세로로 길게 쪼갠 형태를 취하였으며 왼쪽에는 유희경의 시를, 오른쪽에는 이매창의 시를 새겼다. 또한 구조물의 뒷부분을 98㎝로 높이고 앞을 42㎝로 낮춘 빗각 모양을 취함으로써 시인성(視認性)을 높였다. 비의 설계는 덕성 여자 대학교 서양화과 양만기 교수가 맡았다.

 

16 : 46. 도봉산역 1번출구.

도봉산역에서 본 북한산. 도봉산.

 

16 : 51. 2번출구앞 서울 창포원.서울둘레길안내쎈터에 들려 완주인증서와 메달.리본을 받고.
2021.7.10에 시작해서 2021.10.5일로 9회에 걸친 서울둘레길을 마친다.

 

17 ; 12. 도봉역 화장실에서 씻고 1호선 전철 타고

17 : 48. 청량리역에서 환승하여

20 : 18. 천안역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