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둘레길.한양도성길

한양도성 순성길 2. (숭례문-남산-흥인지문-혜화문) .

한양도성 순성길 2. (숭례문-남산-흥인지문-혜화문) .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13.2km(6시간 25분).

 

◈ 일시 : 2021. 10. 12 (화). 비가 조금 온다고 했는데 날씨좋음.

 

◈ 동행인 : 정영옥님. 오후엔 김형식님. 이정아님 합류.

 

◈ 지도.

 

 

 

남색은 한양도성순성길.녹색은 삼남길. 노란색은 영남길. 청색은 이순신 백의종군로.

 

 

트랙.

도성길2(숭례문 ㅡ흥인지문)22021-10-12 0818.gpx
0.07MB

 

카카오맵으로 트랙보기.

 

 

일정정리.

 

06 : 29. 천안 봉명역에서 서울역행 급행전철로 출발.

08 : 15. 서울역 1번 출구로 나가 2번출구앞 강우규동상앞에서 정영옥님 만나
엘레베이터가 있는 나선형 계단으로 서울로 7017로 올라가 서울역주변을 둘러보고 숭례문으로 감.

08 : 37. 숭례문. 국보1호. 휴무라 문을 닫았다.토욜이 한글날이라 휴무인데 공휴일이라 월욜이 대채휴무인데
월욜이 고궁등이 정기휴일이라 또 화욜이 대채휴무란다. 영남길. 삼남길할때도 들려간 곳이다.

08 : 48. 남산공원. 계단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올라가 백범광장에 내려서기전에
인왕산. 백악산. 북한산과 남쪽으로 관악산. 청계산을 보고 이시영선생동상. 백범김구동상을 지난다.

08 : 59. 안중근 기념관. 공사가 끝난 노천 한양유적 전시관을 보고 데크길따라 남산을 올라간다.

09 ; 25. 잠두봉 전망대에서 다시 한 번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과 수락. 불암산을 돌아본다.

09 : 44. 남산케이블카 탑승장을 지나 남산 팔각정(270.1m). 국사당터.좌측엔 목면산 봉수대터
우측엔 남산타워.타워는 문을 닫았다.
넓직한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정기노선 버스가 올라온다.

09 : 55/10.05. 갈림길. 직진하는 도로는 군부대로 가는 길이고 좌측 데크길로 내려간다.

10 ; 12. 전망데크. 국립극장이 코앞에 보이고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과 검단산등조망.

10 : 31. 국립극장앞 교차로. 도로를 건너 반얀트리클럽앤 스파서울안으로 들어가 분수대옆 데크길을 따라간다.

10 : 46. 성곽마루앞삼거리. 앞에 보이는 성곽마루 2층 정사는 입구를 막아놨다. 좌측으로 성곽을 따라간다.

10 ; 59. 신라호텔 야외조각공원옆.

11 : 04/08. 장충체육관앞 버스류장. 좌측에 장충체육관 후문.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길을 따라간다.

11 ; 25.광희문(시구문(屍口門). 水口門 ). 우측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퇴계로와 을지로를 건너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2번출구를 지나 우측으로 간다.

11 ; 35.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달인클럽 김회장님과 통화하여 DDP패션몰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간수문을 찾아간다.

11 : 49. 이간수문. 찾기가 쉽지않다. 북문 남쪽 지표면 3.7m 아래에 있다.
도성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內四山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으로 나갔다.

12 : 11. 오간수교.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둘러보고왔다.김형식 달인클럽 회장님과 이정아님을 만났다.

12 ; 21/13 : 40. 흥인지문(보물1호)옆 동래복국집에서 점심. 정아씨 점심 잘 먹었습니다.

13 ; 44. 흥인지문 문화공원. 성벽따라 편안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간다.

14 ; 05. 이화동 벽화마을을 지나 전망대.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과 남산을 둘러본다.

14 : 10/12. 낙산정상(124.4m). 북한산. 도봉산과 인왕산. 안산조망.
내려서 2분쯤 가서는 우측 암문으로 나가 성벽을 좌측에 끼고 간다.

14 : 21. 장수마을. 우측 170m에 삼군부 총무당. 총무당은 한성대학 근처다.

14 : 32. 혜화문(동소문)앞. 길 건너에 혜화문. 우측 아래엔 4호선 한성대입구역.
14 : 41. 좌측으로 내려가 대학로의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옛날 얘기하고 놀다

16 : 10. 4호선 혜화역에서 전찰타고

16 ; 26. 동대문역에서 일행들과 헤어져 1호선 환승.

18 : 21. 천안역도착.

 

 

06 : 29. 천안 봉명역에서 서울역행 급행전철로 출발.

08 : 15. 서울역 1번 출구로 나가 2번출구앞 강우규동상앞에서 정영옥님 만나
엘레베이터가 있는 나선형 계단으로 서울로 7017로 올라가 서울역주변을 둘러보고 숭례문으로 감.

구 서울역사.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대지면적 26만 9095㎡, 건물면적 1만 7200㎡, 지상 2층 지하 1층의 돌·벽돌 혼합건물이다. 경부선·경의선 등 철도 주요 간선열차의 시발역인 동시에 종착역이었으나 새로운 역사가 신축되어 현재는 폐쇄되었다.

1900년 7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약 33㎡(10평) 규모의 목조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원래의 위치는 염천교 부근이었으며 명칭은 남대문역이었다. 1925년 9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새롭게 신축하였고 역사명도 경성역으로 변경하였다. 당시 신축된 건물은 규모도 상당하였지만 지붕의 돔과 독특한 외관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건축 자재는 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1층 중앙홀은 바닥을 화강암으로 깔고 중벽(中壁)은 석재, 벽에는 인조석을 붙였다. 건물 안의 귀빈실 마루바닥은 모두 박달나무로 깔았고 2층에는 양식당을 설치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뒤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개명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역사의 일부가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이후 서울역사는 수도 서울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남부·서부 역사를 신설, 본역사와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2004년 1월 새로운 민자역사가 신축되면서 구 역사는 폐쇄되었다. 2009년 7월 구 역사의 문화재적 가치 회복과 근대 문화재의 문화 공간화를 위해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2011년 8월 복원 공사를 마치고 '문화역 서울 284'로 재탄생하였다.

 

 

 

한국철도 100년기념판.

 

강우규의사 동상.
2번 출구 앞이다. 우측에 보이는 나선형 계단이 엘리베이터 타는곳이다.

자 찬구(燦九), 호 왈우(曰愚). 1859년 6월 2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朴殷植)·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하여 조국에 돌아가 거사(擧事)할 것을 자원,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라다 육군소장, 혼마치 경찰서장 등 핵심인물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강우규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군과 경찰들에게 공포심과 암살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줬다. 폭탄 투척 후 피신하던 중 일제 경찰에 복무한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구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우규 [姜宇奎] (두산백과)

서울로 7017.

국내 최초의 고가 보행로로 2017년 5월 20일 첫선을 보인 공간이다.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은 서울역 고가가 만들어진 1970년도와 보행길로 탈바꿈한 2017년, 고가와 이어지는 17개의 길을 뜻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도심재생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으로, 서울시는 2015년 서울역 고가를 전면 폐쇄한 뒤 2년간 공사를 진행했다. 1970년 개통된 서울역 고가는 2013년 재난위험등급 최하점인 D등급을 받아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원화 계획을 들고나오면서 공중정원으로 거듭났다. 이후 2015년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네덜란드의 건축가 위니마스가 설계자로 선정돼 공사가 진행됐다.

서울로 7017은 도심 철도 고가도로에 꽃과 나무를 심고 벤치와 수변 공간 등을 조성한 공중공원인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linePark)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서울로 7017은 일자로 뻗은 길을 따라 50과 228종, 2만 4000여 개의 꽃과 나무가 심겨져 있다. 밤이 되면 공중정원을 비추는 111개 통합폴에 달린 LED 조명 555개와 화분 551개를 둘러싼 원형 띠 조명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건물과 연결 통로 등을 통해 퇴계로·남대문시장·회현동·숭례문·한양도성·세종대로·공항터미널·청파동·만리동·손기정공원·중림동·서소문공원 등 각종 명소로 연결된다.

 

서울로7017에서 남대문.

 

서울로 7017에서 서울역.

 

08 : 37. 숭례문. 국보1호. 휴무라 문을 닫았다.토욜이 한글날이라 휴무인데 공휴일이라 월욜이 대채휴무인데
월욜이 고궁등이 정기휴일이라 또 화욜이 대채휴무란다. 영남길. 삼남길할때도 들려간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위에서 본 남대문.

길건너 용궁사.

 

08 : 48. 남산공원. 계단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올라가 백범광장에 내려서기전에
인왕산. 백악산. 북한산과 남쪽으로 관악산. 청계산을 보고 이시영선생상. 백범김구상을 지난다.

백범광장옆에서 본 인왕산(좌)-백악산(북악. 우앞산)과 뒤로 한일자를 그은 족두리봉-향로봉-비봉-보현봉능선.

땡겨본 북악산(우측앞산)과 뒤로 비봉-문수봉-보현봉.

 

백범광장의 초대 부통령 이시영동상(좌) 백범 김구동상(우).

 

백범광장에서 남산.

 

관악산(좌)과 삼상산(우).

 

백범광장에서 불암산(우)

08 : 59. 안중근 기념관. 공사가 끝난 노천 한양유적 전시관을 보고 데크길따라 남산을 올라간다.

안중근기념관.

 

한양유적전시관.

 

14세기에 만든 각자성석은 천자문 글자로 축성구간이 표시됐고
15세기 것은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이 새겨있고
17세기 이후것은 공사책임자와 석공의 이름이 새겨 있는데 모두280개가 남아있단다.

남산자락에서 발견된 내자육배척이라 새겨진 14세기각자성석인데 이는
북쪽 백악산에서  우측 시계방향으로 시작해 60번째 구간(천자문 순서로 天에서 시작해 60번째 奈)으로
구간 길이가 600척(180m)이라는 뜻이란다.

1396년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때  총길이는 天에서 시작해 97번째 弔로 끝나니 한구간을 600척(180m)로
본다면 17460m쯤 되겠다.

 

 

09 ; 25. 잠두봉 전망대에서 다시 한 번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과 수락. 불암산을 돌아본다.

잠두봉 전망대에서 본 안산(좌)-인왕산 곡장-범바위-인왕산정상(맨우측에서 두번째 바위봉).

 

잠두봉전망대에서 본 백악산(북악산.가운데 앞봉)과 뒤로 족두리봉(맨좌측)-향로봉-비봉-문수봉-보현봉(맨우측)능선.

 

잠두봉전망대에서 본 보현봉(맨좌측)-도봉산 인수봉-칼바위능선.

 

잠두봉전망대에서 본 수락산과 불암산(우).

잠두봉전망대에서 본 멀리 천마지맥능선.

 

케이불카 타는곳. 대인 편도 10000원. 왕복 13000. 장애인 경로는 소인요금(7000\ 왕복 \9500)

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 83 남산에 위치한 케이블카로,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꼭대기에 있는 예장동 승강장까지 약 600m 구간을 운행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객용 케이블카로, 1958년 1월 15일 설립돼 1962년 5월 12일부터 운행을 시작하였다. 남산케이블카는 한국삭도공업이 1961년 정부 허가를 받은 이후 정부의 '국유지 대부계약'을 통해 산림청과 5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매번 갱신하면서 운영되고 있다.

남산 케이블카는 평균 초속 3.2m로 운행하므로 편도 운행 시간은 약 3분 정도이며, 산정으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된다. 운행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행하며, 요금은 대인 왕복 기준으로 1만 3000원이다.

한편, 서울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있는 높이 256.2m의 남산은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남산에는 서울타워를 비롯해 백범광장, 남산도서관, 팔각정 등의 명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N서울타워를 기점으로 남산을 한 바퀴 도는 남산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사랑의 열쇠 뒤로 백악산.북한산. 도봉산.

 

09 : 44. 남산케이블카 탑승장을 지나 남산 팔각정(270.1m). 국사당터.좌측엔 목면산 봉수대터
우측엔 남산타워.타워는 문을 닫았다.
넓직한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정기노선 버스가 올라온다.

남산팔각정.

남산은 인경산, 열경산으로도 불리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목멱산이다. 조선 팔도의 5개 지역 봉수대에서 올라온 봉화의 최종 목적지다. 우리가 봄 벚꽃, 가을 단풍을 만끽하듯이 조선시대 사람들도 꽃구경을 하러 자주 찾던 곳이다. 옛사람들은 목멱산에 5.5km에 걸쳐 한양도성을 쌓았다. 1898년 일본인들의 신사를 짓기 위해 왜성대공원이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1910년에 한양공원이 들어서고, 이어 약 33만 m2가 넘는 넓은 부지에 조선신궁이 들어섰다. 1939년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고 전국적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국신민서사비를 건립하게 했는데, 남산 자락에도 16m가 넘는 황국신민서사지주를 세우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한양도성 성벽이 파괴되었다.

 

목면산(남산)봉수대.

봉수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봉우리에서 봉화나 연기를 이용해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던 시설물이다. 밤에는 횃불인 봉화, 낮에는 연기를 피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봉수제는 중국의 후한 광무제 때 이미 상당히 정비된 제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정확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부터라고 전해진다. 봉수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의 틀이 정비되면서 발전된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봉수대는 전국에 620여 개소가 있었으며 이들은 목멱산(남산)에 있는 5개소의 경봉수(京烽燧)를 최종 목적지로 편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목멱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산에는 태조 3년(1394)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근 500여 년간 봉수대가 유지되었으며, 서울에 위치한 봉수대라 하여 일명 경봉수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 봉수대를 〈청구도〉(靑丘圖) 등 관련 자료를 통해 고증하여 복원해놓은 것이다.1)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의 제1봉부터 서쪽 방향으로 제5봉에 이르는 다섯 개의 봉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봉의 봉수대는 함경도를 출발하여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양주의 아차산(지금의 광진구)에 닿은 신호를 받았고, 제2봉의 봉수대는 경상도 해안을 출발하여 경상도 내륙과 충청도 내륙을 거쳐 경기도 광주로 이어진 봉화를 받았다. 제3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지나 경기도 내륙을 거쳐 한성의 무악 동봉에 전해진 신호를 받았고, 제4봉의 봉수대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을 따라 경기도의 육로로 들어와 한성의 무악 서봉에 연결된 봉화를 받았으며, 제5봉의 봉수대는 전라도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양천(지금의 강서구)의 개화산으로 전달된 봉수를 받았다.

신호는 횃불이나 연기의 수를 조정하여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냈는데, 한 번 드는 것을 일거(一炬)라 하여 평상시에는 일거, 해상이나 국경 부근에 적이 나타나면 이거, 변경이나 해안 가까이에 적이 나타나면 삼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병선과 접전을 하면 사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을 침범한 적과 접전을 하면 오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안개, 비, 바람 등으로 기후가 나빠 봉수가 불가능해지면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으로 인근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각 봉수대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리기도 했다.

 

 

봉수대봉수의식은 코로나로 하지 않는다.

 

국사당터.

목멱신사( 木覓神祠 )

서울 남산에서 목멱산신(木覓山神)을 배향(配享)하던 사당.

목멱산은 현재의 남산을 일컫고, 목멱신사(木覓神祠)에 대한 이칭은 흔히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하였다. 목멱신사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두루 보인다.

목멱산신을 모시게 된 내력은 『태조실록』 4년 조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조가 이조에 명하여 남산을 봉하여 목멱대왕으로 삼은 뒤 경대부와 사서는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목멱신사는 목멱산 마루에 있어서 봄과 가을로 초제(醮祭)를 행하였다고 전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경성 목멱산 잠두봉 국사당 음사(京城 木覓山 蠶頭峰 國師堂 淫祀)”라고 해서 비판한 바 있고, 목멱산신에게 제사를 베풀 때는 전사청(典祀廳)을 국사당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고려공민왕, 본조 승 무학(本朝 僧 無學), 고려 승 나옹(懶翁), 서역 승 지공(指空) 등의 영상 및 기타 제신상을 걸어놓았다.

또 맹자상(盲者像)과 소녀상이 있는데 소녀상은 두신(痘神)이라 하여 신전에 지분 등을 베풀어 지나치게 설혹(褻惑: 더럽고 정신없게)하였고 기도 또한 성대히 베풀어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멱신사에서 배향되는 신격은 모두 무속에서 섬기는 신들이므로 무속신앙의 형태를 확인하게 된다.

목멱신사는 한마디로 나라에서 행하는 굿을 베풀던 사당이고, 산천제의 기능을 하던 곳이라 하겠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산천에 제를 지냈다고 하였으니 목멱신사도 그러한 제를 지냈던 곳이다.

목멱신사에 주로 빌었던 내용은 나라를 지키고 복을 비는 수호기복, 왕가나 왕손의 병을 구원하자는 구병 등이 대부분이다. 고대로부터 지속되어온 산악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당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목멱신사이다.

이 신사는 1925년까지 본래 남산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에 신궁(神宮)을 지으면서 목멱신사가 그들의 신궁보다 높이 있다고 하여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자리로 옮기도록 강요했다.

때문에 남산의 당을 헐고 사당의 일부를 인왕산 서쪽으로 옮겨 조립해서 그 형태나 구조가 원형과 비슷하게 남게 되었다. 목멱신사가 훼철되고 사당의 일부가 이전된 후 인왕산 국사당이란 명칭으로 1973년 중요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고, 이곳의 무신도 28점은 이보다 앞서 1970년에 중요민속자료 17호로 지정된 바 있다.

 

 

 

남산N서울타워.

남산은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산이다. 해발 265m로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있는 서울타워의 높이가 더해져 남산이 주는 느낌은 당당하다. 조선시대 북악산과 인왕산, 낙산 그리고 이 남산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성벽의 역할을 했으며 이 산들을 잇는 약 18㎞의 성곽이 있었다. 남산 정상에는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어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소식을 중앙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1397년에 세워진 국사당은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을 지키는 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일제 때 남산에 신궁이 생기면서 헐려 지금은 표자석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도심 한가운데서 도시가 내뿜는 공해를 정화시키는 산소통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서울시민들에게는 휴식의 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특히 해 질 무렵 남산에 올라 하나 둘 조명을 밝힌 빌딩 숲을 내려다보거나 남쪽으로 노을에 물들어가는 한강의 풍경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높이 236.7m의 N서울타워는 1969년 방송 송신탑으로 만들어졌다가 1980년부터 전망대가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원기둥 형태로 만들어진 전체 5층의 타워룸은 2층과 3층의 전망대와 5층의 회전식 레스토랑으로 꾸며져 있는데 특히 타워 2층의 ‘하늘 화장실’과 48분을 주기로 360° 회전하며 서울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타워 5층의 회전식 레스토랑은 서울타워의 자랑이다.

 

85타임캡슐.
1985.9.22일 현재 대한민국사람들의  생각과 생활과 환경을 나타내는 물건과 기록물 466점을 담았다.
500년후인 2485년 후손들연단다. 중앙일보 20주년기념사업으로 만들었단다.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각종의 물건들을 특수용기에 담아 땅속에 보관,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발굴하도록 하는 인류 문화유산 보존방법.1938년 미국 웨스팅 하우스 전기회사가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물품들을 선정, 땅속에 묻으면서 타임 캡슐이란 용어를 사용해서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4년 11월 29일 서울 정도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타임 캡슐을 매장했다.

 

남산을 내려오며 본 청계산과 우면산줄기.

 

09 : 55/10.05. 갈림길. 직진하는 도로는 군부대로 가는 길이고 좌측 데크길로 내려간다.

갈림길앞에서 뒤 돌아 본 남산타워.

 

10 ; 12. 전망데크. 국립극장이 코앞에 보이고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과 검단산등조망.

전망데크에서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

 

전망데크에서 국립극장.

 

국립극장.

1950년 4월 29일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국립극단을 창단하고, 1950년 4월 30일 창단공연으로 연극 《원술랑》과 《뇌우》를 무대에 올렸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이전하였다가 1957년 6월 1일 다시 서울로 이관하고, 1962년 1월 15일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 등의 전속단체를 창단하였다.

1969년 3월 8일 KBS로부터 교향악단을 인수하여 국립교향악단으로 개칭하고, 1973년 5월 국립발레단과 국립합창단을 창단하였다. 1973년 10월 17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국립극장을 개관하고 1981년 8월 1일 국립교향악단을 KBS로 이관하였다. 1982년 5월 15일 야외놀이마당을 개장하고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1월 1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으며 2000년 2월 1일 국립발레단·국립오페라단·국립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였다.

대극장인 해오름극장과 소극장인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등으로 이루어졌다. 해오름극장은 1,563석, 달오름극장은 427석, 별오름극장 80~100석, 하늘극장 600석 규모이다. 해오름극장에서는 스페인의 〈마리아 로사 발레단〉, 미국의 〈워싱턴 발레단〉, 일본의 〈가부키 극단〉과 뮤지컬 극단 〈사계〉 등의 유명 예술단체가 내한하여 공연하였고, 달오름극장에서는 완창판소리, 일요상설무대 등 전통 상설무대와 해설이 있는 발레, 소극장 오페라축제, 대학연극축제 등 다양한 장르의 고정 기획물이 무대에 올랐다.

조직은 운영지원부·공연기획부·무대예술부·교육전시부 등 4개 과로 구성되어 있고,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등 3개 전속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59(장충동2가)에 있다.

 

 

10 : 31. 국립극장앞 교차로. 도로를 건너 반얀트리클럽앤 스파서울안으로 들어가 분수대옆 데크길을 따라간다.

반얀트리클럽앤 스파서울의 분수대에서 데크길따라 간다.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6성급 도심형 리조트 호텔이다. 바로 앞에 국립극장이, 뒤로는 서울타워가 있다. 반얀트리의 전신은 타워호텔로, 1969년 1월 개관 후 1988년 특 2급 호텔로 승격되어 2007년까지 운영되었다. 2007년 (주)새한씨앤씨가 타워호텔을 인수하였고 이후 3년 간의 리모델링을 거쳤다. 2010년 6월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호텔’로 이름을 바꾸고 재 개장 하였다. 럭셔리 도심형 리조트 호텔을 컨셉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34개의 객실과 16개의 스위트룸, 스파, 피트니스 센터, 연회장, 골프클럽 등의 시설이 있다.

 

10 : 46. 성곽마루앞삼거리. 앞에 보이는 성곽마루 2층 정사는 입구를 막아놨다. 좌측으로 성곽을 따라간다.

한양도성순성길은 정자 가기전에 좌측으로 가고 삼남길, 영남길은 이정자를 지나 매봉으로 간다.

 

10 ; 59. 신라호텔 야외조각공원옆.

호텔신라가 세워진 것은 1973년이다. 정부가 직접 운영하고 있던 서울 장충동 영빈관을 삼성그룹이 인수해 지금의 호텔신라가 들어섰다. 영빈관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빈용 숙소를 따로 지으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계획됐다. 이후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두 차례 공사가 중단됐다가 1967년 완성됐다.

정부는 1973년 경영난에 빠졌던 국영 워커힐 호텔과 영빈관을 민간 기업에 팔기로 했다. 이 해 삼성그룹은 영빈관 인수를 위해 그룹 안에 호텔사업부를 신설했다. 같은 해 5월 호텔신라의 전신인 (주)임페리얼을 세웠고 두 달 뒤 영빈관을 인수했다. 워커힐 호텔은 선경그룹 계열사였던 선경개발에 팔렸다. 그 해 11월 호텔신라 건물 기공식이 열렸다. 임페리얼은 회사 이름을 (주)호텔신라로 바꿨다. 1979년 호텔신라가 문을 열었다.

 

장충체육관.

대지 1만 865㎡. 건평 7,755㎡. 식(式). 수용인원 8000명.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실내경기장으로 1963년 2월 1일 개관하였는데, 원래 육군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다.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구조설계 및 건축설계는 건축가 최종완이 맡았다. 1,000kW 수은등 40개, 1,500kW 자연등 40개가 장치되어 있으며 전자식 스코어보드도 설치되어 있다.

농구·배구·핸드볼 등의 구기와 복싱·레슬링·역도·씨름 등 개인경기의 국내외 시합이 거행되며, 체육경기 외에도 각종 공개행사가 개최된다. 1988년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때에는 유도태권도 경기가 열렸다. 2021년 기준 남자 프로배구 우리카드 우리WON과 여자 프로배구 GS칼텍스 서울킥스배구단의 홈구장이다.

2014년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1만 373㎡ 규모로, 관람석은 590석이 늘어난 5248석으로 리모델링하여 2015년 1월 재개장하였다.

 

11 : 04/08. 장충체육관앞 버스류장. 좌측에 장충체육관 후문.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길을 따라간다.

횡단보도건너 골목길로

 

한양도성순성길은 서울둘레길 같이 리본이 없고 가끔 이런 동판이 바닥에 있는데 별 도움이 인된다.

 

 

11 ; 25.광희문(시구문(屍口門). 水口門 ). 우측 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퇴계로와 을지로를 건너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2번출구를 지나 우측으로 간다.

광희문.  4소문중 하나로 동쪽에 있는 문으로 죽은 시체들이 이문으로 많이 나간 모양이다.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 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류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류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문루가 파고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사진 앞쪽의 건널목을 건너 간다.

동대문역사공원역  2번출구를 지니 우측으로 가고

 

11 ; 35.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달인클럽 김회장님과 통화하여 DDP패션몰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간수문을 찾아간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2007년 12월 철거된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하였으며, 2009년에 착공하여 2014년 3월에 개관하였다. 

동대문운동장의 공원화와 지하공간 개발에 따른 상업 문화활동 추진, 디자인 산업 지원시설 건립 등 복합 문화공간 건립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동대문운동장의 공원화는 2000년부터 언론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2005년 서울시에서 동대문운동장의 기능대체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2006년 9월 공원화사업 계획을 수립하였고, 2007년 8월 국제 지명초청 현상설계경기 방식을 통하여 설계 작품을 선정한 뒤 10월에 건립 및 운영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2009년 4월에 착공하여 10월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먼저 개장한 뒤 2013년 11월 전체 공사를 준공하고 2014년 3월 21일에 개관하였다.

설계는 이라크 태생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맡았으며, 건축 컨셉은 '환유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이다. 환유(換喩)는 특정 사물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역사적·문화적·도시적·사회적·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풍경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축물 외부와 내부에 직선이나 벽이 없이 액체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공간적 유연성이 특징이며, 최첨단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 설계기법, 메가트러스(Mega-Truss;초대형 지붕트러스)와 3차원 배열의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 구조 등을 통하여 최소한의 실내 기둥으로 안전하면서도 우주공간처럼 느껴지는 대규모 공간감을 구현하였다.

규모는 대지면적 6만 2957㎡, 건축면적 2만 5008㎡, 연면적 8만 5320㎡ 에 지하 3층, 지상 4층이다. 주요 시설은 알림터·배움터·살림터·어울림광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림터(art hall)는 알림1관·알림2관·국제회의장으로 구성되며, 컨벤션·신제품 발표회·전시회·패션쇼·콘서트·공연·시사회 등의 장소로 활용된다. 배움터(museum)는 디자인박물관·둘레길쉼터·디자인전시관·디자인둘레길과 어린이·청소년 및 가족 단위로 디자인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디자인놀이터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터(design lab)는 살림1관·살림2관·잔디사랑방·디자인나눔관으로 구성되며, 디자인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플랫폼으로 활용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앞마당 격인 어울림광장은 24시간 개방되는 복합 편집매장인 디자인장터(design market)와 종합안내실, 유구(遺構)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한양도성 성곽, 디자인 전용 전시 공간인 갤러리문, 이간수전시장, 예술 프로그램 공간인 이간수마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주차장과 의무실, 여성휴게실, 수유실, 물품보관소와 카페 공간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서울시에서 설립한 서울디자인재단에서 관리, 운영한다.

 

 

이 그림에서 겨우 이간수문 위치를 찾았다.
우측 윗쪽의 붉은글씨 A2지점이 이간수문 위치다.

구 동대문운동장이 있던곳이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성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일부이다.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 철거 작업을 시작하면서 매장된 유물들이 출토되어 2008년 1월 문화재 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2009년 6월 발굴된 유물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을 발표하고 같은 해 10월 27일에 개장하였다. 부지 면적은 6만 5232㎡이며, 주요 시설은 동대문역사관, 서울 한양도성(서울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 유적,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간수 전시장, 이간수마당, 갤러리문(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대문역사관에는 조선 전기에서 근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층에서 출토된 2575건, 2778점의 유물이 시대별, 발굴 지역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발굴된 유물들의 토층(土層) 탐험, 하도감(下都監) 터와 이간수문을 3D로 복원한 영상관, 유구지별 유물탐색 체험, 8면 바닥 영상, 유물발굴 체험, 동대문역사 백과사전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제공된다.

서울 한양도성(사적 10) 유적은 발굴된 265m 구간 중에 이간수문과 치성(雉城)이 포함된 142m 구간이 정비·복원되어 있고, 성곽이 멸실된 123m 구간은 지적도의 추정성곽선을 근거로 복원되었다. 이간수문은 남산 기슭에서 청계천 본류로 흐르던 남소문 동천 위에 세워졌던 2칸 구조의 수문으로, 1910~1915년 일제가 성곽을 철거할 때 묻혔다가 발굴된 것이다. 치성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돌출되어 성벽을 견고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가 취약한 곳을 보완하도록 축조된 방어시설로, 한양도성 성곽에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는 1925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어 2007년 철거되기까지 근현대의 80여 년간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자 대중행사 및 기념행사 장소로 활용된 동대문운동장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외부에는 1968년 보수공사 때 설치된 야간조명탑 2대와 1966년 서울에서 열린 제47회 전국체육대회 때 점화된 성화대가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이간수전시장(구 이벤트홀)은 소규모 전시회·음악회·콘퍼런스·행사 등을 위한 공간, 이간수마당은 예술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며, 갤러리문은 디자인 전용 갤러리이다. 서울시에서 설립한 서울디자인재단에서 관리, 운영한다.

 

 

 

 

 

11 : 49. 이간수문. 찾기가 쉽지않다. 북문 남쪽 지표면 3.7m 아래에 있다.
도성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內四山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으로 나갔다.

이간수문.
조선 세종때 장마철을 대비해 만들었던 수문이다.
일제 강점기 한양도성을 허무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혔다가 2008년 동대문운동장 발굴 당시
관중석 지하 3.7m에서 발견된 홍예식(아치형)수문이다.

 

복원한 동대문운동장자리의 성벽.

 

 

동대문운동장 기념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은 83년 동안 서울의 스포츠 메카였던 동대문운동장을 추억하는 공간이다. 1925년 일본 히로히토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고, 2007년에 철거되었다. 그동안 경성운동장에서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며 숱한 스포츠 역사를 썼던 곳이다.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뿐 아니라 프로야구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 등 이름만 들어도 추억이 떠오르는 경기들이 열렸던 곳이다. 기념관 내부에는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모형, 동대문운동장 직인, 검표기, 표수거함 등 동대문운동장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흑백 영상과 당시 상황을 재현한 디오라마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대문운동장 조명탑은 1968년 5개가 설치되었는데, 보존 차원에서 지금은 2개가 남아 있다.

 

 

 

12 : 11. 오간수교.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둘러보고왔다.김형식 달인클럽 회장님과 이정아님을 만났다.

 오간수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된 5개의 구멍을 만들어 홍예교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다섯 칸의 수문을 설치했다고 하여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으나 성종 12년(1481)까지만 해도 수문이 3개였고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되었다. 이 수문은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었다.

실제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에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하였다가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12 ; 21/13 : 40. 흥인지문(보물1호)옆 동래복국집에서 점심. 정아씨 점심 잘 먹었습니다.

1996년 백두대간을 할때부터 함께한 달인클럽 김형식회장님(좌)와 두꺼비 정영옥님(우)과 영원한
달인클럽 마스코트며 막내인 이정아님(앞).

달인클럽은 지난해 명성지맥에서 차량 사고 이후 산행은 접고 지금도 한 주는 둘레길, 한  주는 섬산행을 하고있다.
내가 함께하지못해 만날 기회가 없어 이번 서울둘레길과 도성길을 마치며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이 돼
일없는 백수 4명이 모여 점심을 같이하고 낙산을 넘어 혜화동까지 걷고 대학로에 가서 차마시며 회포를 풀고왔다 

복집메뉴.


오늘도 정아씨가 점심에 차와 빵이며  풀코스로 오라버니들을 챙겼다.

 

흥인지문.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성벽에 있는 각자성석.
14세기에 만든 각자성석은 천자문 글자로 축성구간이 표시됐고
15세기 것은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이 새겨있고
17세기 이후것은 공사책임자와 석공의 이름이 새겨 있는데 모두280개가 남아 있단다.

 

13 ; 44. 흥인지문 문화공원. 성벽따라 편안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간다.

 

뒤 돌아 본 흥인지문과 동대문역사공원.

 

이화동벽화마을.

 

14 ; 05. 이화동 벽화마을을 지나 전망대.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과 남산을 둘러본다.

전망대에서 안산(중 뾰족봉). 인왕산(우)

전망대에서 백악산(북악산.좌). 백악곡성(능선 가운데 하얀집윗봉).구진봉(우).

 

 

전망대에서 본 북한산 보현봉(중)과 백운대(맨우측).

 

낙산정상으로 가면서  본 남산.

 

14 : 10/12. 낙산정상(124.4m). 북한산. 도봉산과 인왕산. 안산조망.
내려서 2분쯤 가서는 우측 암문으로 나가 성벽을 좌측에 끼고 간다.

낙산정상(124.4m).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신대약수에는 강세황의 글씨인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암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과 이별하고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폐서인되어 낙산 아래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고 창신동 골짜기에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샘물이 있던 곳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암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의 총무당이 있었는데,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萬)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찰로는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가 있고,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미타사는 여승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다. 근래에는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으며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낙산정상에서 본 수락산과 불암산.

 

낙산정상에서 본 북한산 보현봉과 백운대.

낙산정상에서 본 백악산.

 

낙산정상에서 본 남산과 뒤로 관악산.

 

여기서 우측 성밖으로 나간다.

 

성밖으로 나가서 본 북한산과 성북동.

 

 

14 : 21. 장수마을. 우측 170m에 삼군부 총무당. 총무당은 한성대학 근처다.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三軍府) 청사의 중심이 되는 본전(本殿)으로 원래는 지금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政府綜合廳舍) 자리에 있었는데 1930년에 성북구 돈암동 자리로 옮겨왔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 팔작기와집이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이 집권한 뒤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1868년(고종 5)에 세워졌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조선말 신헌(申櫶 )의 글씨이다. 1880년 고종 재위 17년 삼군부가 없어지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으로 통합되어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보병대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총무당 양쪽 옆에 덕의당· 청헌당이 있었는데, 총무당만 이곳으로 옮기고 덕의당은 그 당시에 없어졌으며, 삼군부 청헌당은 1967년에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으로 옮겼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 양식이다. 1978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 總武堂] (두산백과)

 

 

14 : 32. 혜화문(동소문)앞. 길 건너에 혜화문. 우측 아래엔 4호선 한성대입구역.

 

14 : 41. 좌측으로 내려가 대학로의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옛날 얘기하고 놀다

 

16 : 10. 4호선 혜화역에서 전찰타고

16 ; 26. 동대문역에서 일행들과 헤어져 1호선 환승.

18 : 21. 천안역도착.